[시들지 않는 정의 ①] 반세기 ‘암흑의 시간’을 버틴 동아·조선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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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정의 ①] 반세기 ‘암흑의 시간’을 버틴 동아·조선투위

투데이신문 2025-12-17 16:4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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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일단의 기자들이 있었다. 권력에 맞서다 강제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소속 기자·PD·아나운서. 그들은 유신 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언론 자유를 향한 외침과 진실의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권력에 맞선 그들에게 돌아온 건 강제 해직의 칼날이었다. 펜은 칼에 꺾였지만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신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투쟁은 한국 언론사에 ‘자유’를 새긴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그러나 승리의 역사가 기록되는 동안, 정작 그 주역들의 삶은 잊혀지고 외면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흑백의 시간’ 속에 남겨졌다. 투데이신문은 기획연재 [시들지 않는 정의]를 통해 동아투위, 조선투위의 과거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언론과 시민사회가 지고 있는 ‘자유의 부채(負債)’를 묻고 지연된 정의 앞에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인물의 심연까지 포착해내는 한국 사진계의 거장 서대호 작가와 함께했다.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주름진 얼굴과 한 송이의 꽃은 야만의 시대를 견뎌낸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참회의 ‘헌화’다. 투데이신문이 만난 ‘노병’들의 여전히 날 선 눈빛은 시들지 않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1975년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강제 해직된 동아투위 위원들은 6개월간 출근 시간마다 회사 앞에 모여 신문회관 또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동아투위<br>
1975년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강제 해직된 동아투위 위원들은 6개월간 출근 시간마다 회사 앞에 모여 신문회관 또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동아투위

【투데이신문 강지혜 박효령 권신영 전세라 기자】“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21조는 이 원칙을 가장 앞자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언론의 자유는 쉽사리 허용되지 않았다. 1970년대 유신 정권 시기, 언론인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권력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은 한국 언론사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선언 이후 상당수 언론인이 집단 해직을 당하며 직업적 기반과 사회적 위치를 잃는 등 심각한 ‘실존적’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명예 회복 논의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들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떤 책임을 다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권력과 언론, 반복된 탄압의 역사

언론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와 재건의 국면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고 동시에 그 책임을 방기한 순간도 반복해왔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경향신문 여적필화 사건이 발생해 정권 비판을 이유로 신문이 폐간되는 등 언론 탄압이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 아래 긴급조치와 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정화 조치라는 명분으로 언론인 1000여 명을 해직시켰고 문화공보부와 안기부를 중심으로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을 전방위로 관리했다. 이 시기 공영방송은 정권 홍보 도구로 기능했으며 5·18 보도 역시 편향과 왜곡 논란을 남겼다.

문민정부 이후에도 언론 장악 논란은 반복됐다. 이명박 정부 시기 공영방송 경영진 교체 논란이 이어졌고 종합편성채널 도입은 특정 정치 성향에 우호적인 방송 환경을 제도적으로 고착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론은 권력 감시라는 본래의 책무와 정권의 이해관계에 기울어진 보도 사이에서 줄곧 신뢰의 시험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동시에 역사의 방향을 바꿔왔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는 경찰 발표의 허위를 드러내며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결말을 이끌어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는 윤석열 정권의 정당성과 신뢰가 급속히 흔들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기자(記者)는 사실을 기록하는 자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의 현장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그 흐름을 바꾸는 변곡점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이 그토록 집요하게 기자의 펜을 꺾으려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05년 3월 1일 30년 만에 동아일보 옛 사옥(현 일민미술관) 정문 앞에 모인 동아투위 위원들  ⓒ동아투위 
2005년 3월 1일 30년 만에 동아일보 옛 사옥(현 일민미술관) 정문 앞에 모인 동아투위 위원들  ⓒ동아투위 

자유를 향한 정면충돌, 유신 정권과 기자들

권력이 언론을 두려워했던 가장 선명한 장면은 유신 정권 시기였다. 당시 언론탄압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이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소속 언론인들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표한 2008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언론자유는 헌법과 긴급조치를 비롯한 각종 법률적 규제와 행정 조치들로 인해 많은 제약과 규제를 받았으며 특히 중앙정보부는 주도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12월 중순부터 1975년 7월 초까지 지속적으로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앞서 1973년 조선일보를 상대로 광고 수주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효과를 봤던 대로 경영상 압박을 가해 언론사 사주를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동아일보사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는 기사 방향과 크기까지 지시했으며 이에 불응한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불법 연행, 폭행, 고문, 회유, 협박, 사표 종용, 해임 압력 등을 행사했다. 

1975년 유신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외친 언론인들이 서울 도심 거리에서 함께 걷고 있다.  ⓒ동아투위 
1975년 유신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외친 언론인들이 서울 도심 거리에서 함께 걷고 있다.  ⓒ동아투위 

급기야 1974년 10월 23일, 서울대 학생 시위 관련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동아일보 송건호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은 외부 간섭 배제와 불법 연행을 거부하고 자유언론을 실천과제로 부르짖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같은날 조선일보 기자 150여명도 ‘언론자유회복을 위한 선언문’,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등이 ‘중앙매스컴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언론인들의 지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신아일보, 동양통신, 합동통신, 문화방송 등 전국 35개 언론사가 1주일 만에 언론자유실천선언에 동참하거나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발표했다.

유신 정권의 대응은 대규모 탄압이었다. 동아일보는 1975년 3월 8일부터 5월 1일까지 7차례에 걸쳐 49명을 해임하고 84명을 무기정직 처분했다. 기자들의 농성은 1975년 3월 17일 새벽 강제 해산됐으며, 같은 시기 조선일보에서도 32명의 기자가 해직되고 기자협회보도 폐간됐다. 당시 편집국에서 쫓겨난 이들은 대부분 30대와 40대의 젊은 기자들이었다. 한창 취재 일선을 누벼야 할 나이에, 그리고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시기에 그들은 거리로 나앉게 됐다. 또한 경찰에 연행되고 억울한 옥살이까지 그들의 삶의 질곡은 계속 이어졌다.

자유언론 실천선언 30주년 기념행사 준비를 위해 모인 동아투위 위원들 ⓒ동아투위 
자유언론 실천선언 30주년 기념행사 준비를 위해 모인 동아투위 위원들 ⓒ동아투위 

1975년 3월 17일에 멈춰 선 시간

이들에 대한 핍박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와 문화공보부 등 당국은 이후에도 자유언론실천을 주장하는 기자들에 대한 복직과 재취업을 집요하게 막았다. 신군부 독재 하에서도 해직 언론인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가 이뤄졌으며 반정부 반체제 분자로 취급하며 취업을 막았다. 이들은 정권 눈치를 피해 출판사, 잡지사, 기업체, 연구소 등에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민주화·인권·노동운동 현장에 연대하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말> 지를 창간하고 보도지침을 폭로했으며 언론사상 최초의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  창간에 이르기까지 대안언론의 토대를 만든 주역이었다.

30여 년이 흐른 2008년에 이르러서야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이 공식적으로 인정됐고 이듬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며 비로소 명예 회복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사법농단에 가까운 판결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듯 해직 언론인의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은 아직도 요원하다.

50년이 넘도록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1975년 3월 17일, 거리로 내몰린 그날에 머물러 있다. 그들에게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이며 언론자유의 미완의 역사다. 이들은 매월 17일 모여 여전히 유효한 기억과 다짐을 나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이 역사에 대한 사회적 사과와 책임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는 한 세대의 희생 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그 빚을 갚아가는 과정에 서 있다.

투데이신문이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사건을 2025년 12월 17일 다시 묻는 것은, 기자이기 이전에 이 땅의 한 젊은이였던 그들이 단지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탄압의 그늘과 후유증에 시달려 살아가야 하는 것이 과연 문명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연된 정의를 바로 세우지 않는 사회는 반드시 그 불행한 역사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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