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엔비디아의 고성능 인공지능(AI) 칩 ‘H200’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밝히면서, 그동안 중국의 AI·첨단기술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강경한 수출 통제 기조를 유지해 온 트럼프 행정부가 이 같은 결정 내린 배경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중국 화웨이가 이미 H200급 칩을 개발할 수 있다는 미 행정 당국의 판단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H200을 공급해 중국의 엔비디아 의존도를 유지·확대하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에서는 AI 및 반도체 자립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미국 투자자들이 중국의 AI 관련 업체에 대규모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美, H200 수출 깜짝 허용…"중국이 더 좋은 칩 만든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지난 8일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칩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했다. H200은 최신 블랙웰 기반 그래픽처리장치(GPU)보다는 성능이 낮지만, 현재 중국 수출이 승인된 저사양 칩인 H20보다는 크게 높은 사양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 통신은 “이미 중국 화웨이가 비슷한 성능의 AI 칩을 개발했기 때문”이라고 9일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엔비디아의 중국 경쟁사인 화웨이가 이미 유사한 성능의 AI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수출 허용이 안보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을 두고 의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H200이 블랙웰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강력한 성능을 보이는 칩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치로 인해 미국의 AI 주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1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 하원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의 존 물레나 공화당 의원은 최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중국 기업에 최첨단 반도체 판매를 승인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 1기 행정부가 구축한 전략적 우위를 약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中, 엔비디아 칩 접근 제한…자국 반도체로 대체"
이런 가운데 중국에서도 H200 수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FT는 9일 중국 당국이 H200을 구매하려는 자국 기업에 ‘승인 절차’를 의무화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중국 당국은 올초 엔비디아의 중국 전용 칩셋인 H20에 대해서도 해당 칩의 성능이 중국산 대체품보다 크게 우수하지 않다며 기업들의 구매를 제한한 바 있다.
이는 중국이 반도체 자립을 목표로 자국 반도체 산업 부양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FT는 지난 10일자 기사에서 중국이 최근 화웨이와 캠브리콘 등 중국 기업들의 AI 프로세서를 정부 승인 공급업체 목록에 처음으로 추가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는 중국 공공 부문에서 국산 반도체 사용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 내 칩 제조사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신규 매출을 창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화웨이 등 자국 업체가 추가된 중국 정부의 해당 ‘정보기술혁신제품’ 목록은 매년 수십억 달러를 IT 제품 조달에 지출하는 정부 기관, 공공 기관 및 국영 기업을 위한 지침 역할을 한다. 지난 몇 년간 AMD와 인텔 제품 대체용 국내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대체용 운영체제가 목록에 추가됐는데, 이로 인해 정부 기관, 학교, 병원 등 중국 공공기관과 국영 기업에서 외국 기술 제품이 점차 퇴출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중국 AI 기업에 뭉칫돈…기술주 ETF는 美 추월"
한편 미국 금융가에서는 최근 중국의 AI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 ‘딥시크 쇼크’ 이후 중국이 비교적 낮은 성능의 AI 칩을 가지고도 미국의 경쟁사들과 맞먹는 AI 모델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이 중국 시장에 점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0일 “미국 투자자들이 미·중 간 기술 경쟁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AI 관련 중국 기업들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며 “투자자들은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하는 중국 기술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지난 7월 이후 중국 기술주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로의 자금 유입 규모가 미국 기술 ETF로 유입되는 자금을 앞질렀다고 밝혔다. 중국 기술주에 대한 미국 투자자들의 관심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 노무라증권의 중국 인터넷 주식 연구 책임자 시지롱 또한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시장”이라며 “미국 투자자들의 자금 유입이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미국 투자자들은 알리바바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터 제공업체 LSEG에 따르면 미국 운용사인 뱅가드그룹과 블랙록, 피델리티가 운용하는 펀드들은 올해 알리바바의 홍콩 상장 주식 보유 지분을 늘렸다.
이는 알리바바가 인공지능(AI)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알리바바는 향후 3년간 총 530억달러(약 77조7000억원)를 투입해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 개발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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