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도널드 트럼프(79)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영국 공영방송 BBC 기자를 향해 던진 한 마디는 단순한 분노 표출 이상의 것이었다.
"당신네 방송은 끔찍하다."
이 순간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신뢰받는 공영 언론(Public Service Broadcasting, PSB)의 상징인 BBC가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공격당하는 21세기 정보 냉전의 서막이었다.
트럼프는 BBC를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외국 언론'으로 규정했고, 그들의 비판적 보도를 '정치적 공격'으로 간주했다. 이는 BBC의 높은 글로벌 신뢰도 가 미국 내 여론에 미치는 파급력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전 트럼프 캠프 전략가는 BBC를 경계 대상으로 삼은 이유를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언론이 미국 내 여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며, 이를 '정보 주권 수호'로 포장했다고 밝혔다.
공영 미디어의 재정 구조상 취약점은 트럼프 진영에 명확한 공격 지점을 제공했다. BBC의 주요 재원인 수신료(License Fee)는 영국 정치권의 재가에 의존하며 , 이는 권력이 공영 언론의 독립성을 위협할 수 있는 지렛대로 작용한다. 트럼프의 공격은 이러한 공영 미디어 모델의 구조적 취약성을 전 세계적으로 드러내는 지정학적 시험대였다.
'가짜뉴스'의 무기화와 현장 기자들에 대한 폭력의 정상화
트럼프의 미디어 전략은 비판 보도를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는 논리에 기반했다. 그는 BBC와 CNN을 묶어 "가짜뉴스 공장"이라 비난했고, 백악관 대변인 캐롤라인 리빗(Karoline Leavitt)까지 나서 BBC 다큐멘터리를 "100% 가짜뉴스"라고 낙인찍으며, 트럼프 연설에 대한 '선택적이고 조작적인 편집'을 통해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했다.
수사학적 공격은 권력에 의한 물리적 배제로 이어졌다. 코로나19 대응 브리핑에서 트럼프는 팬데믹 대응팀 해체(2018년 5월)에 관한 BBC 기자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는데 , 이는 BBC를 브리핑룸에서 '비정통적(illegitimate)'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침묵의 검열'이었다.
더욱 위험했던 것은 현장에서의 물리적 위협이었다. 2019년 텍사스 유세 현장에서 BBC 카메라맨 론 스킨스(Ron Skeans)는 트럼프 지지자로 보이는 인물에게 공격을 받았고, 상황을 제압하려던 경호원마저 기자를 밀치는 행위가 포착됐다. 현장 기자는 "우린 반복적으로 폭언을 들었고, 실제 물리적 위협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 없이 "그는 위협에 대응했을 뿐"이라며 경호원을 옹호했다. 권력자의 이러한 묵인은 적대적인 환경을 정상화하며, BBC가 미국 내 취재 시 보안 인력을 강화하는 '비용화된 검열'을 감수하도록 만들었다.
BBC의 당시 편집 책임자 프랜 앤슬러(Fran Unsworth)는 내부 회의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수천만 명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이라며 "불편한 진실이 진실임을 피하지 말자"고 강조하며 내부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100억 달러(약 13조 5,000억 원) 소송: 법적 전략의 경제적 무기화
트럼프와 BBC의 갈등은 2024년 10월 BBC 시사 다큐멘터리 '파노라마: 트럼프, 두 번째 기회?'(Trump: A Second Chance?) 보도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연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약 54분 간격으로 떨어진 두 문장("우리는 국회의사당으로 걸어 내려갈 것이고 내가 당신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와 "우리는 지옥처럼 싸울 것이다")을 짜깁기해 트럼프가 폭동을 직접 선동한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편집 오류는 BBC 내부에서 팀 데이비(Tim Davie) 총국장과 뉴스 책임자 데보라 터니스(Deborah Turness) 등 고위 경영진이 사임하거나 해고되는 초유의 사태를 불렀다 . 트럼프는 이 사태를 두고 "BBC의 최고위층들이 내 1월 6일 연설을 '조작'하다가 잡혀서 모두 그만두거나 해고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2025년 12월 15일, 트럼프는 플로리다 연방법원에 BBC를 상대로 100억 달러 (약 13조 5,00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공식 제기했다. 이는 언론을 처벌하려는 캠페인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글로벌 처벌 캠페인(Punish the Press Global)'의 성격을 갖는다.
소송은 명예훼손(Defamation)에 50억 달러(약 6조 7,500억 원), 플로리다 기만적/불공정 무역 관행법(Florida Deceptive and Unfair Trade Practices Act, FDUTPA) 위반에 50억 달러(약 6조 7,500억 원)를 각각 청구하는 방식이었다. FDUTPA는 일반적으로 소비자 보호를 위한 상업적 사기 방지 법규인데, 트럼프 측은 BBC의 보도를 '악의적이고 기만적인 상업 행위'로 규정함으로써 ,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 영역을 넘어 막대한 재정적 압박을 가하려 했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소송 규모는 승소 자체보다 BBC에 엄청난 법적 비용을 부과하고, 비판적 보도를 위축시키려는 경제적 무기화 전략이다. 이 소송에서 BBC가 패소할 경우, 수신료 기반의 공영 언론 재원이 트럼프와 같은 정치적 적대 세력에게 흘러가는 상황을 초래하여 , 영국의 정보 주권과 BBC의 편집 독립성 자체를 위협하는 선례가 될 수 있다. BBC는 소송 방어 의지를 표명했으며 , 미국 내 미방영을 근거로 소송 기각(Dismissal)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정학적 파장: 유럽 공영 미디어에 대한 포퓰리즘의 연대 공격
트럼프가 BBC에 사용한 '가짜뉴스' 프레임과 공격 전략은 국경을 넘어 유럽 내 우익 포퓰리즘 세력에게 확산됐다. 영국의 극우 인사 나이젤 패라지(Nigel Farage)가 이끄는 개혁 UK(Reform UK)당은 BBC 수신료 모델의 폐지와 공영방송의 규모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 유럽 전역의 극우 정당들(독일의 AfD, 프랑스의 국민연합 등)도 자국 공영방송에 유사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으며 , 이는 포퓰리즘 정치 세력이 공영 언론을 공격하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국 정부 역시 키어 스타머 총리의 대변인을 통해 소송에 대한 공식 입장은 유보하면서도, "강력하고 독립적인 BBC의 원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트럼프와 BBC의 싸움은 단순한 명예훼손 소송이 아니다. 이는 포퓰리즘 시대에 객관적 사실 보도가 얼마만큼의 경제적, 물리적, 법적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전 세계 공영 언론의 생존 게임이다. 이 갈등은 BBC가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 구조, 거버넌스, 그리고 편집 투명성을 혁신적으로 강화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겨줬다. BBC는 굴복하지 않았지만, 전 세계 공영 미디어는 이제 국제적인 연대와 새로운 방어 체계의 구축을 시급히 논의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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