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조선 말, 화단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었던 화가 김수철(金秀哲). 그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을 추구한 인물로, 산수와 화초 그림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자는 사익(士益), 호는 북산(北山)이라 불린 김수철은, 절제된 필치와 세련된 색채로 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겨울 산수(冬景山水圖)’는 세로 119cm, 가로 46cm 크기의 종이에 그려진 회화 작품이다. 화폭에는 눈 덮인 산과 고요한 계곡이 펼쳐져 있으며, 인간과 자연, 고독과 사색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품을 통해 조선 말 화가들이 추구한 정신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작품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시문이 적혀 있다.
“계산(溪山)은 고요하고 물어 볼 사람 없어도, 임포 처사의 집을 잘도 찾아가네(溪山寂寂無人間 好訪林逋處士家)”
이 글귀는 작품이 송나라 시대 임포(林逋, 967-1028)의 고독한 삶을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 임포는 서호(西湖) 외딴 산 속에서 20년간 마을에 내려오지 않고 학과 매화를 사랑하며 살았으며, 후대에 큰 존경을 받았다. 김수철은 이러한 역사적 인물을 조선적 색채와 감각으로 재현했다.
김수철의 그림에서는 간결함과 절제가 돋보인다. 산과 바위는 윤곽선만으로 형태를 잡고, 음영이나 과도한 장식은 배제되었다. 대신 엷은 먹빛과 태점(苔點) 기법으로 산과 바위의 질감을 살려, 화면 전체에 차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색채의 대비는 작품의 핵심적인 시각적 장치다. 먹빛의 겨울 풍경 속, 임포가 머무는 집과 그의 옷은 붉은색으로 강조되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다리를 건너 찾아오는 인물의 옷은 푸른색으로 그려져,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가 화면에 리듬을 더하고 관람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작품은 관람객이 임포의 고요한 삶과 주변 자연, 찾아오는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색과 고독,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음미하도록 이끈다.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필치와 색채 대비는, 조선 후기 회화가 담고 있는 정신적 성취를 체감하게 한다.
‘겨울 산수’는 조선 회화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다. 송나라 고사를 소재로 삼아 조선적 감각과 표현으로 재해석한 이 그림은, 당시 화가들이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미학과 사유를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산수와 고사를 통해 인간과 자연, 철학과 사색을 회화 속에 담아낸 점은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또한 김수철의 작품은 조선 말 화단의 예술적 실험과 개인적 표현을 보여준다. 화면의 절제된 구성과 필치, 부분적 색채 강조는 화가가 추구한 새로운 감각과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작품 속 사유를 이해하도록 이끈다.
현대 관람객에게도 이 작품은 여전히 생생하다. 관람객은 작품 속 임포의 고요한 공간과 겨울 산수의 생명력을 직접 체험하며, 시대를 넘어선 미학과 철학적 울림을 느낄 수 있다.
눈 덮인 산과 바위, 붉은 집과 푸른 옷, 고요와 사색이 어우러진 ‘겨울 산수’는 단순한 회화를 넘어 조선 회화의 정신과 역사적 깊이를 담은 문화유산이다. 김수철의 손끝에서 피어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관람객에게 고요한 감동의 시간을 선사하며, 한국 회화의 가치와 미학을 새롭게 일깨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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