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조조] 소설 연재 안내
본 소설은 현 정세의 사건들을 조조, 손권 등의 인물과 탁류파, 청류파 등의 가상 정치 세력으로 치환하여 재구성한 팩션(Faction)물입니다.
서라, 짐짓 '대의를 앞세우나' 실은 사사로운 이익과 권력을 좇는 자들을 탁류파(濁流派)라 칭하고, 그 반대편에서 '청명한 정치를 부르짖으나' 실은 권문세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을 청류파(淸流派)라 부르노라. 현재 탁류파는 여당인 주민당, 청류파는 야당인 민국의힘이니라. 조조(曹操)는 탁류파의 우두머리이자 대선을 통하여 대권을 잡은 당대 제일의 웅걸 명재이 대통령이다. 조조의 대적이자 청류파가 밀던 인물은 곧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손권(孫權, 열석윤 전 대통령)이었다.
승상(丞相) 조조(曹操)가 위(魏)의 왕위를 차지한 이래, 그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위해 북벌(北伐), 즉 잃어버린 북쪽 땅과의 관계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의 새로운 방침은 전임 황제 손권(孫權, 열석윤)의 강경책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조의 새로운 책략: '화평공존책'의 등장
전대의 황제 손권은 비록 청류파(淸流派)의 지지를 받았으나, 북방의 흉포한 세력에 맞서 ‘담대한 구상’이라는 강경한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선(先) 비핵화’ 없이는 그 어떤 상응하는 조치도 허용치 않겠다는 강대강(強對強)의 기조였다.
그러나 실용(實用)을 숭상하는 위왕 조조는 달랐다. 그는 북방과의 관계를 단순히 ‘강제로 굴복시켜야 할 적’이 아닌, ‘함께 살아야 할 이웃’으로 보았다. 조조는 즉위 후, ‘화평공존 프로세스’를 천명하고 그 핵심으로 삼대(三大) 지향점을 제시했다.
평화 공존의 제도화: 두 국가가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하여 제도적으로 평화를 담보한다. 이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처럼 공존하자는 현실론이었다.
공동 성장 기반 구축: 경제 협력을 통해 남북이 함께 번영할 토대를 마련한다.
전쟁과 핵 없는 한반도: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남북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지향점을 마지막 순위에 배치했다.
조조는 조정의 중신들에게 말했다.
"북방의 태도는 냉랭하나, 특별한 진척이 없다 하여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끊임없이 긍정적인 평화의 노력을 쌓는다면, 결국은 좁은 틈이라도 생길 것이다!"
이는 북방의 즉각적인 태도 변화를 기다리지 않고,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조조의 통 큰 결단이었다.
두 부처의 충돌: 자주파와 동맹파의 극한 대립
조조가 이처럼 북벌의 방향을 '화평'으로 틀자, 조정을 구성하는 두 핵심 부서, 즉 통일부(統一府)와 외무부(外務府) 간에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다.
통일부 대신(大臣) 영동정은 '자주파(自主派)'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북방과의 관계는 위나라의 주권(主權)이 미치는 영역이며, 오직 통일부만이 그 업무를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핵 협상 수석대표를 겸하는 외무부 대장군(大將軍) 두연정는 ‘동맹파(同盟派)’의 상징이었다. 외무부는 위나라를 굳건히 지탱하는 대서국(大西國, 미국)과의 외교 공조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조조의 '화평공존책'이 자칫 대서국과의 동맹에 균열을 낼까 우려했다.
삼국지의 재현: 관우와 장비의 불화
이는 마치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성격과 임무의 차이로 불화를 겪는 것과 같았다. 통일부는 북방과의 교류라는 임무에만 충실하여 동맹의 눈치를 보지 않으려 했고, 외무부는 대서국과의 안보 공조라는 더 큰 틀을 우선시하며 통일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이런 갈등은 외무부가 대서국과의 '대북정책 정례 공조회의'를 주도하여 가동하려 했을 때 폭발했다. 이 회의는 조조가 내세운 화평공존책의 구체적인 '속도'와 '방향'을 대서국과 조율하려는 목적이었다.
통일부 대신 영동정은 격노하며 외무부 회의 불참을 선언했다.
“어찌 외무부가 우리 통일부의 주권 영역을 침범하는가! 남북 관계는 명백히 위나라 주권의 영역이다! 외교 현안은 외교부, 남북 대화는 통일부가 별도로 협의해야 할 일!”
영동정은 통일부의 주권 회복을 위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서 감찰부'의 악몽: 제2의 워킹그룹 트라우마
통일부가 외무부 주도의 공조회의에 격렬히 반발하는 데는 깊은 트라우마가 있었다. 바로 과거 손권 재위 시절 운용되었던 '한미 워킹그룹(Working Group)'의 망령 때문이었다. 통일부에서는 이 공조회의가 제2의 '대서 감찰부(大西 監察部)'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과거 대서 감찰부는 남북 협력에 필요한 대서국의 제재 면제를 일괄 논의하는 창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실제로는 위나라의 남북 협력에 '족쇄'를 채우는 통제 기구로 전락했었기 때문이다.
가장 참담한 일은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 지원이 무산된 사건이었다. 통일부가 북방과 인도적 지원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서 감찰부는 치료제를 운반할 '운반 트럭'이 대서국의 제재를 위반하는지 여부를 따지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지원은 수포로 돌아갔다. 북방에서도 이를 '남측이 스스로 제 목에 걸어놓은 친미사대의 올가미'라며 강력히 비난했었다.
이에 전대 통일부 대신을 역임했던 '자주파 육현(自主派 六賢)' 원동임, 현세정 등 여섯 명의 원로들이 긴급히 모여 성명을 발표했다 .
"외무부는 남북관계 역사에서 개성공단을 만들 때나 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 대서국보다도 훨씬 더 부정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전문성이 없고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무부에 어찌 북벌의 대계를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조조의 동맹 중시 기조에 대한 공개적인 정치적 반발을 감행하며, 통일부 중심의 '자주적 북벌 재개'를 강력히 촉구했다.
조조의 딜레마와 교훈
위왕 조조는 태평성대를 열고자 했으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세운 '화평공존책'이 오히려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형국을 맞이했다. 탁류파(여당) 내에서 자주파와 동맹파가 극한으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내부의 마찰은 북방 세력에게 '위나라의 조정이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약점을 노출시켰다. 북방은 한미 공조 강화 움직임에 대해 “우리 국가에 변함없이 적대적이려는 미한의 대결적 기도”라며 강하게 반발하며 대화 거부의 명분을 쌓았다.
조조는 지금 '내부의 결속'과 '대외적 목표 달성'이라는 딜레마에 처했다.
조조가 있는 대통령실에서 "선(線)을 넘으면 교통정리"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 이미 부처 간의 갈등은 만천하에 드러난 뒤였다.
삼국지에서 지혜로운 제갈량(諸葛亮)은 늘 '내부 수습이 외부 확장보다 우선'임을 강조했다. 만약 조조가 이 내부의 주도권 싸움을 조속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의 '화평공존 프로세스'는 북방 세력과의 첫 대면도 전에 동력을 잃고 좌초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고금의 현자들은 말한다.
“수내실(修內實)이면 외적불침(外敵不侵)이라. 내부의 간극을 수습치 못하면, 북벌은 미처 시작도 못하고 흔들릴 것이다.”
조조는 과연 이 난국을 수습하고 천하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시선이 위왕 조조의 다음 행보에 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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