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인공지능(AI) 연산 수요가 폭증하면서 글로벌 데이터센터와 빅테크의 투자 전략이 흔들리고 있다. 범용 그래픽처리장치(GPU)의 대안으로 떠오른 주문형 반도체(ASIC)가 전력 효율과 비용 경쟁력을 앞세워 AI 인프라의 핵심 변수로 급부상하고 있어서다.
AI 연산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ASIC은 엔비디아 독주 체제를 흔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 전력·비용 앞세운 ASIC…엔비디아 독주에 균열
ASIC(Application-Specific Integrated Circuit)은 이름 그대로 ‘특정 애플리케이션 전용’으로 설계된 반도체다. 회로 구조와 명령 처리 방식, 온칩 메모리 구성까지 한 가지 용도에 맞춰 처음부터 설계하기 때문에 범용 처리를 염두에 둔 CPU·GPU와 태생부터 다르다. 스마트폰 AP에 들어가는 모뎀 칩, 비트코인 채굴기, 구글의 텐서처리장치(TPU) 등은 모두 대표적인 ASIC 계열로 꼽힌다.
AI 분야에서 ASIC은 대규모 행렬 연산과 특정 모델 구조(트랜스포머 등), 대량 추론(inference)에 특화된 ‘AI 전용 칩’으로 진화하고 있다. 곱셈·덧셈 연산 유닛, 데이터 이동 경로, 온칩 버퍼·캐시 메모리를 모두 AI 워크로드에 맞춰 재배치해 일반 연산은 못해도 AI만큼은 끝내주게 잘하는 구조를 지향하는 것이다. GPU가 ‘무엇이 들어와도 어느 정도는 처리하는 칩’이라면 ASIC은 ‘딱 정해진 일만 압도적으로 잘하는 칩’에 가깝다.
AI 특화 ASIC의 가장 큰 무기는 ‘성능·전력·비용’ 세 가지다. 범용 연산을 위해 다양한 회로와 기능을 탑재한 GPU와 달리,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덜어내고 특정 연산에 모든 자원을 집중할 수 있다.
업계에선 “동일 공정·동일 전력 기준으로 봤을 때 AI ASIC이 GPU 대비 가격·성능에서 30~40% 이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같은 1와트를 쓸 때 더 많은 연산을 처리하고 같은 성능을 내려면 전력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AI 칩 시장에서 엔비디아는 여전히 70~90%에 달하는 점유율로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구글, 아마존, 메타, 테슬라, 오픈AI, 알리바바 등 주요 빅테크가 잇따라 자체 AI ASIC 개발에 뛰어들면서 ‘탈엔비디아’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들 빅테크 기업들은 'GPU+ASIC' 하이브리드 인프라로 전환하며 AI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고 있다.
또 TPU, Trainium 등 전용 ASIC 수요 증가로 파운드리(TSMC, 삼성전자)와 설계 IP 기업(Broadcom 등)이 수혜를 받고 엔비디아 중심의 GPU 독점 구조는 완화되는 추세로 이어지고 있다.
J.P.모건 등은 AI 가속용 ASIC 시장이 연 40~50% 성장하며 2026년 이후 성장 속도에서 GPU를 앞지를 수 있다고 전망한다. ASIC이 모든 영역에서 GPU를 대체하긴 어렵지만 대규모 추론과 자사 서비스 전용 워크로드에서는 가격·전력 경쟁력으로 엔비디아 물량을 부분 잠식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 범용 vs 맞춤형…GPU와 ASIC의 역할 분화
결국 GPU는 개발과 실험에 최적화된 범용 가속기라면 ASIC은 대규모 상용 서비스를 위한 효율 중심의 인프라 칩으로 역할이 갈린다. GPU는 그래픽 연산을 위해 수천 개의 코어를 병렬로 배치한 범용 가속기로 다양한 AI 모델을 비교적 쉽게 올릴 수 있는 유연성이 강점이다.
반면 ASIC은 처음부터 특정 모델 구조와 연산 패턴에 맞춰 회로를 정의해 동일 공정에서도 훨씬 높은 연산 밀도와 에너지 효율을 구현할 수 있다. 그 대신 한번 설계가 굳으면 소프트웨어·모델이 크게 바뀔 때 신속한 대응이 어렵고 초기 개발비용이 수억~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결국 GPU는 ‘범용·개발 속도’, ASIC은 ‘규모의 경제·운영 효율’이라는 상반된 지점을 향하는 셈이다.
ASIC이 모든 영역에서 GPU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지만 트래픽이 안정된 대규모 추론 서비스나 특정 모델에 특화된 워크로드에서는 GPU 물량을 상당 부분 잠식하는 구도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증권·리서치 업계에서는 AI 가속용 ASIC 시장이 연 40~50% 성장하며 2026년 이후에는 성장 속도 측면에서 GPU를 앞지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시장에선 “GPU는 AI 혁신의 실험실, ASIC은 대규모 상용 서비스의 공장 설비”라는 말이 나온다.
◆ ‘엔비디아 편중’ 흔들린다…HBM 판로 다변화
ASIC 부상은 메모리 시장에도 직격탄이다. 구글 TPU, 아마존 트레이니엄, 브로드컴 설계 ASIC 등 주요 AI 칩에 고대역폭메모리(HBM)가 기본 탑재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의 수혜 구도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엔비디아향 HBM’이 거의 전부였다면 이제는 구글·아마존·메타·바이트댄스 등 각종 ASIC 고객으로 판로가 다변화되는 추세다. 브로드컴이 빅테크용 AI ASIC 물량을 공격적으로 늘리면서 SK하이닉스의 HBM 대규모 발주가 이어지고 삼성전자 역시 HBM3E·HBM4 등 차세대 제품으로 ASIC 생태계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 독주가 약해질수록 ‘엔비디아+다수 ASIC’ 구조에서 한국 메모리 기업의 협상력과 이익률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엔비디아의 GPU 왕좌가 당장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강력한 쿠다(CUDA) 생태계와 소프트웨어 도구, 방대한 개발자 커뮤니티, 검증된 레퍼런스 디자인은 GPU 진영의 가장 큰 진입장벽이다. 새로운 모델을 시험하고 생태계를 키워야 하는 스타트업과 연구기관, 중소형 클라우드 사업자는 여전히 GPU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만 AI 서비스 트래픽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각국이 데이터센터 전력난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전력·비용 한계를 고려하면 대형 클라우드·빅테크의 자체 ASIC 투자는 필연적인 흐름에 가깝다. 결국 ASIC은 엔비디아의 절대 왕좌를 위협하는 유일한 대안이자 AI 반도체 권력 지형 변화를 상징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업계관계자는 “GPU가 AI 혁신의 속도를 책임져 왔다면 ASIC은 그 혁신을 얼마나 효율적으로지속할 수 있을지를 좌우하는 ‘비즈니스의 칩’으로 부상하고 있다”며 “AI 인프라 경쟁이 성능 경쟁에서 전력·비용 경쟁으로 넘어가는 순간 ASIC과 GPU의 힘겨루기는 한층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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