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수적인 시장으로 꼽히던 B2B(기업 간 거래) 식자재 유통 시장에 균열이 가고 있다. 전화나 문자 주문, 외상 거래 등 '아날로그' 방식이 지배하던 이곳에 디지털 전환 바람이 거세다. 단순한 온라인 주문을 넘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데이터 경영이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15일 서울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농산물유통혁신대전’의 ‘2026 농식품 유통 전망’ 강연자로 나선 임사성 마켓보로 대표는 식자재 시장의 무게중심이 급격히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임 대표는 "오프라인 관행에 의존하던 B2B 식자재 유통 시장에서 온라인 전환 흐름이 뚜렷하다"며 "이제는 단순 연결을 넘어 기술과 데이터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켓보로가 공개한 자체 조사 데이터는 현장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외식 사업자의 약 60%가 이미 온라인 채널을 통해 식자재를 구매한 경험이 있으며, 그중 상당수가 월 2회 이상 반복 구매하는 패턴을 보였다. 과거 도매상과의 관계나 관행에 얽매였던 식당 사장님들이 더 저렴하고, 선택지가 다양하며, 새벽 배송까지 가능한 온라인 플랫폼으로 갈아타고 있다는 방증이다.
임 대표는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와 구별되는 B2B 시장만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불특정 다수의 기호에 맞춰야 하는 B2C와 달리, 식당이 주체인 B2B는 필요한 상품과 물량을 명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식당별 구매 패턴과 널뛰는 식자재 가격 변동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유통 모델이 시장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며 "시장의 주도권이 공급자에서 데이터를 쥔 수요자 중심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켓보로는 이 지점에서 'AI 솔루션'을 차기 승부수로 던졌다. 지난 9년간 식자재 유통 관리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인 ‘마켓봄’과 오픈마켓 ‘식봄’을 운영하며 축적한 12조 원 규모의 거래 데이터를 무기로 삼았다. 지역별, 업종별, 메뉴별로 세분화된 방대한 데이터에 AI 기술을 접목해 유통사와 식당 양측의 비효율을 걷어내겠다는 구상이다.
구체적으로 유통사에게는 계약 생산과 유통 계획을 정교하게 수립할 수 있는 솔루션을, 식당 사장님들에게는 AI가 뽑아준 최적의 비교 견적으로 구매 비용을 절감하는 솔루션을 제공할 계획이다.
하지만 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임 대표는 "아무리 AI 시대가 도래해도 외식업의 본질인 '상품 품질'이 최우선이라는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는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더라도 식자재의 신선도와 품질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기술 도입만으로는 시장 안착이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적인 진단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마켓보로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쿠팡이츠나 배달의민족 등 플랫폼 기업들이 식자재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상황에서, 12조 원에 달하는 실거래 데이터를 보유한 버티컬 플랫폼이 보여줄 AI 혁신이 실제 현장의 폐쇄적인 유통 구조를 얼마나 뚫어낼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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