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속이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계절. 그런데도 누군가는 배낭을 메고 설산으로 향합니다. 힐링 대신 고생, 순한 맛 대신 매운맛을 택한 등산 애호가들이 말하는 이 계절 기꺼이 산으로 향하는 이유.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 마운틴러너
장보영
겨울 산에 가는 이유
」한마디로 정신 차릴 수 있다. 겨울 산에 오르면 갈피를 못 잡고 사방팔방 흩어졌던 마음이 한곳으로 정갈하게 모이며 선명해진다. 특히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두운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일 때, 삶을 향한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진다. 그것은 하얀 입김으로 눈에 보인다. 내가 ‘살아 있다’는 자각을 또렷이 할 수 있는 순간이다.
추천하는 등산 코스
」단연 설악산이다. 설악산은 오를 때마다 새롭다. 같은 곳에 올라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번번이 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긴 호흡으로 인내하며 온몸으로 묵묵히 통과해야 하는 겨울, 공룡능선 종주는 마치 아득한 행성을 여행하는 것만 같다. 오색리에서 올라 소공원으로 하산하는 코스, 백담사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도 무척 사랑한다.
설악산 등산 중 만난 상고대
성공적인 겨울 산행을 위한 장비
」레이어링을 철저히 지킨 보온 의류를 착용했다는 전제 하에, 핫팩. 천 원짜리 핫팩을 등과 배에 붙이고 방풍 재킷 양쪽 주머니에 넣으면 그 어떤 겨울산도 거뜬하게 다녀올 수 있다. 귀를 덮는 비니와 기모 장갑 역시 생존을 위해 필수다. 체온이 가장 빨리 떨어지는 부위가 사지말단이다. 머리, 손끝, 발끝만 따뜻해도 겨울 산행은 한층 평안해질 것이다.
비장의 간식
」내 최애 행동식은 ‘명가 찰떡파이’다. 초콜릿과 찰떡의 조합이라 산행 중 빠르게 열량을 채우기에 좋다. 맛있는 데다 이동 중 먹기도 편하다. 살짝 얼어 딱딱해진 초 콜릿을 살살 녹여 먹는 것이 포인트. 최근에는 시큼한 ‘하리보 믹스 사우어’도 좋아졌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침이 고이네.
손민규 〈밥보다 등산〉 저자
손민규
겨울 산에 가는 이유
」일단 눈을 보기 위함이고, 가끔은 일부러라도 힘든 고비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이스터의 책 〈편안함의 습격〉은 우리가 편안함을 추구할수록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극한의 환경에 내 몸을 던질 때 얻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날이 선선할 때보다 힘든 상황에서 산에 올랐을 때 기분이 더 좋았다. 성취감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자신이 감당할 정도의 극한 환경이어야 한다.
추천하는 등산 코스와 꿈의 설산
」겨울 산행 목적은 대개 설산일 텐데, 높을수록 쌓인 눈도 많다. 다만 사는 지역과 해발고도를 따져 적절히 선택하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태백산, 계방산이 등산 초보자도 무난히 오를 만하면서 적설량도 많다. 꿈의 설산이라면 물론 히말라야겠으나 직접 시도할 생각은 없다. 대신 유메마쿠라 바쿠가 쓴 〈신들의 봉우리〉라는 산악 소설을 읽으며 대리만족했다. 산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기를!
겨울 산행 중 말문이 막힌 순간
」상고대를 마주했을 때. 푸른 하늘 아래 나뭇가지에 물방울이 달라붙어 눈꽃처럼 피어난 모습을 보았을 때, 이 숭고한 자연 풍경을 표현하기엔 인간의 언어가 너무 협소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리산 천왕봉
겨울 산에서 꼭 지켜야 할 룰
」20대 때는 무조건 더 힘들고 오래, 높이 오르는 게 멋진 등산이라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웬만하면 4~5시간 넘지 않는 코스로 간다. 다시 〈편안함의 습격〉 속 문장을 인용하자면, “아주 힘들어야 한다, 그러자 죽지 않아야” 하니까.
최애 장비와 간식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얼굴 전체를 감싸는 넥 워머(혹은 등산 머플러)를 선호한다. 겨울은 해가 빨리 떨어지기에 휴대용 손전등도 하나씩 챙기시기를. 휴대폰 플래시도 있지만 기온이 낮을 때는 스마트폰이 예상보다 더 빨리 방전될 수 있다. 보온병도 필수. 따뜻한 물을 마시겠다는 게 아니라, 영하 10도 이하씩 내려가는 겨울산에서 플라스틱 생수병을 들고 간다는 건 물을 마시지 않겠다는 의미다. 물이 어니까.
연말연시 나의 겨울 산행 계획
」오랜만에 지리산 천왕봉에 가보려고 한다. 상고대와 푸른 하늘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윤성중 〈월간 산〉 기자
윤성중
겨울 산에 가는 이유
」솔직히 말하면 일 때문이다. 그럼 ‘일이 아니라면 산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구애없이 산에 간다. 겨울에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은 바로 ‘엄청난 추위’다. 추위는 겨울 산의 매력이자 두려움의 이유다. 겨울에는 보온 장비가 필수다. 두꺼운 침낭과 우모복이 꼭 필요하다. 겨울산은 눈 덮인 풍경도 좋지만 가장 비싸고 좋은 장비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찬 바람 쌩쌩부는 산에서 텐트치고 침낭 속에 들어갈 때 느끼는 안도감은 어디서도 느낄 수가 없다. 삶이 무료하다고 느낀다면 겨울 산에서 추위에 덜덜 떨어보기를!
꿈의 설산과 연말 산행 계획
」내 꿈의 설산은 겨울 일본 북알프스다. 혼슈 중앙부에 있는 히다산맥의 별칭으로, 얼마 전 그곳에 스키 산행을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의 산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라 상당히 놀랐다. 오는 연말연시에는 산 속에 있는 임도(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비포장 도로)에서 산악 스키를 계획 중이다. 한국에서는 자연설에서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기에, 이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꽤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 같다.
일본의 북알프스, 히다 산맥.
입문자를 위한 생존 법칙
」혹독한 겨울산은 충분한 체력을 요한다. 평상시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 뒷산에서 하는 트레일러닝 훈련이 도움이 된다. 아이젠과 스패츠, 트레킹폴을 꼭 챙겨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무지하게 후회한다. 그리고 겨울 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꼭 짝을 이뤄 가는 게 좋다. 겨울 산은 다르다. 준비물이 많고 다른 계절에 비해 단단한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겁낼 필요는 없다. 굳이 정상까지 가야한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면 초보자도 겨울 산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눈 쌓인 첩첩산중을 구경하고 싶다면 강원도 발왕산이나 무주 덕유산을 추천하다. 케이블카가 있기 때문이다.
최애 장비와 간식, 하산 후 맛집
」인공 충전재가 들어간 보온 의류. 프리마로프트라고 부르는 인공 충전재가 든 파타고니아 제품을 주로 사용한다. 가볍고 웬만큼 물에 젖어도 괜찮은 성능이라 이 옷을 꼭 챙겨 다닌다. 10년을 넘게 입었는데 여전히 튼튼하다. 최애 간식은 믹스커피. 평상시엔 쳐다보지도 않는데 겨울 산행 때 마시면 정말 맛있다. 보온병에 끓는 물을 넣어가면 보통 반나절동안 식지 않는데, 이 물로 믹스커피를 마신다. 하산했을 땐 따듯한 국물이 최고다. 고기보다 낫다. 설악산에서 내려와 속초에서 먹은 장칼국수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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