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지난해 국내 항공사들이 지출한 정비비 3조9000억원 가운데 약 60%인 2조4000억원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과 비교하면 해외 정비 비중이 14.5%포인트 늘었다. 국내 항공사의 해외 정비 의존도가 이처럼 높아지자 정부도 항공 MRO(유지·보수·정비) 산업 육성을 위해 체질 개선에 나섰다.
15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10일 발표한 향후 5년간 항공정책 방향인 ‘제4차 항공정책기본계획(2025~2029)’에서 높은 해외 의존도를 국내 항공 MRO 산업의 핵심 취약점으로 지목했다. 국내 정비 역량이 기체 정비에 제한돼 있고, 부품·엔진·화물기 개조 등 고부가 분야는 대형 항공사와 일부 전문 MRO 업체에 집중돼 있어 저비용항공사(LCC)는 엔진 결함 등 돌발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는 진단이다.
정부가 MRO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려는 배경에는 이러한 정비비의 구조적 특성이 있다. 항공기는 운항 기간 발생하는 정비비가 기체 구매 가격의 3~4배에 이를 정도로 비중이 크고, 도입 이후 장기간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이 때문에 MRO 산업은 단발성 수요가 아니라 장기 수요가 보장되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원제작사(OEM)들이 합작사 설립이나 독점적 정비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애프터마켓과 MRO 시장에서 지배력을 강화하는 흐름도 정부가 주목하는 대목이다. 기체와 엔진을 공급한 OEM이 정비까지 사실상 통제하는 구조가 굳어질 경우, 국적 항공사들이 비용과 일정 측면에서 해외 네트워크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MRO 시장 전망도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기본계획에 따르면 글로벌 MRO 시장 규모는 지난해 1190억달러(약 160조원)에서 2035년 1560억 달러(약 210조원)로 연평균 2.7%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기간 아시아태평양 지역 시장도 약 33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국내에서도 이미 매년 수조 원대 정비 수요가 발생하는 만큼, 정비 물량을 해외에 맡기는 구조를 완화하고 국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커지는 이유다.
현장에서는 해외 정비 의존이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 능력과 비용 구조가 만든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대형 항공사의 한 정비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해외로 위탁하는 정비는 주로 중정비다. 이는 단순히 국내 기술이 뒤처져서라기보다 시설과 장비, 인력이 부족해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저비용항공사(LCC)는 정비 여건이 더 열악하다. 관계자는 “제주항공처럼 항공기 규모가 커져도 자체 중정비를 할 수 있는 격납고가 없을 정도로 LCC는 자체 정비 기반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진에어처럼 대형항공사를 모기업으로 두고 있는 LCC도 정비 슬롯이 부족하면 해외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비용 격차도 해외 외주를 부추기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관계자는 “싱가포르, 대만, 중국 등은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낮아 같은 작업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도 총비용이 더 저렴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기술력도 단순 작업 숙련도만이 아니라 제반 시설과 데이터, 장비 체계까지 포함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국내는 투자와 시스템이 답보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제시한 해법의 중심에는 정비 거점 육성이 있다. 인천과 사천을 중심으로 지역 특성을 살린 MRO 클러스터를 조성해 정비 물량을 국내로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다.
그 중 인천은 인천국제공항과 인천첨단복합항공단지를 기반으로 대형기와 화물기 정비·개조 허브로 육성한다는 계획으로, 보잉 777 여객기의 화물기 개조 사업과 보잉 747 화물기 중정비 사업 등 추진 중인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정비와 개조 물량을 집적하겠다는 전략이다. 사천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항공기 제작사가 밀집한 강점을 살려, 제작과 정비가 연계된 클러스터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인센티브와 지원책도 병행된다. 인천첨단복합항공단지에 입주하는 정비 기업에는 토지 임대료 감면을 확대하고, 정비 목적 항공기에 대한 공항시설 사용료 감면도 늘린다. 해외 정비 물량을 국내로 전환하는 항공사에는 운수권 배분 과정에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기술 측면에서는 신형 엔진 정비기술과 친환경 엔진 수리 공정, AI·드론을 활용한 정비 방식 확대가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2027년까지 차세대 엔진 수리 기술과 로봇 기반 검사·정비 기술을 확보해 엔진과 부품 분야의 해외 의존도를 낮춘다는 목표다. 이와 함께 자금 측면에서는 증권형 토큰공모(STO)와 민관 공동펀드 등을 활용해 고가 장비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플랫폼 구축 방안도 담겼다.
정부는 제4차 항공정책기본계획을 통해 항공 MRO 산업을 항공 부문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육성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정비비를 줄이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대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인천·사천 클러스터 조성과 인센티브, 기술·금융·인력 지원으로 구성된 정부의 ‘MRO 해법’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정비 물량을 국내로 되돌릴 수 있을지는 향후 정책 실행 속도와 MRO 전문업체와 항공사의 참여 정도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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