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살다 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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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시인의 얼굴] 살다 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

독서신문 2025-12-15 14:02:00 신고

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긴 병상은
나의 기도까지 메말라 가는 시간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죄가 아닐 수는 없지만
마음 깊이 자꾸 올라온다

큰아들을 앞세우고
실어증 속에 갇힌 어머니

오늘은 겨울 햇살이
이불 위로 흘러내려
얼굴을 비춘다

생각조차 지워진
해맑은 미소

-조문경, 「마지막 죄」

 

살다 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

불우(不遇)하다는 것.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움’을 뜻합니다. 한자를 보면 다른 풀이도 가능하네요. ‘때를 만나지 못함’. 앞선 뜻은 동정의 시선은 아닐까요. 누군가 불우했다면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으면 합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는 온전히 자기로 살 수 있을까요. 죽어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괴로움을 덜어주고 슬픔을 달래줄 구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사람 손길이 아니어도 누군가 곁에서 쓰러지는 몸과 마음 떠받쳐 주는 기적이 있었으면. 태어날 때처럼 누군가 받아 주었으면.

그처럼 시 「마지막 죄」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며 시인은 누구의 죄를 묻고 있는 걸까 많은 생각에 빠집니다. 조문경의 내면적 형벌이 곧 우리가 저지른 죄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한 인간의 스러짐 앞에 ‘인간의 양심’, ‘도덕적 책임’ 같은 것이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삶은 또 얼마나 허무한지. 그럴 때 겨울 햇살이 이 모든 죄와 벌을 지우고 있습니다. 아니 쓰다듬고 다독입니다. ‘해맑은 미소’로 답하는 순간이 자비이며 사랑이고 구원이 아닐까 합니다.

평생 불우하게 살았던 김종삼도 그렇습니다. 조문경처럼 그도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한 노인이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몇 그루의 나무와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BACH의 오보의 주제가 번지어져 가고 있었다 살다보면 자비한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갑자기 해가 지고 있었다.(「유성기」)” 우리도 언젠가 이 시들 속 노인처럼 깊은 암연에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한 줄기 햇살이 우리 얼굴을 어루만지길 기다립니다. 지금에라도 이 가녀린 자비가 ‘흘러내려’, ‘번지어져’ 가기를 소원합니다.

■ 작가 소개 |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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