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교수
2015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채택된 파리협정은 기후변화 대응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채택되어 2005년 발효된 교토의정서가 선진국과 개도국을 구분하며 한계를 드러냈다면, 파리협정은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보편적 체제를 만들어냈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억제하고, 가능하다면 섭씨 1.5도 이내로 제한하겠다는 목표는 과감했고, 당시 인류가 처음으로 합의한 집단적 생존 전략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파리협정은 장미빛 기대와 달리 빛이 바랜 약속처럼 보인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 곡선은 완만해지지 않았고, 폭염과 홍수, 가뭄은 일상이 되었다. 각국의 감축 목표는 반복적으로 갱신되지만, 과학이 요구하는 속도와는 여전히 큰 간극이 있다. 파리협정은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협정을 떠받치는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파리협정을 단순한 환경 협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지난 10년 사이 기후변화는 글로벌 패권 경쟁의 핵심 의제로 편입되었다. 특히 미중(G2) 간의 경제안보 마찰과 패권 경쟁은 파리협정 이후 기후 거버넌스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파리협정이 설계되던 2015년, 세계는 비교적 안정된 질서를 전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은 규범의 설계자였고, 중국은 그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 있었다. 기후변화는 협력 가능한 글로벌 공공재로 인식되었고, 미중 협력은 현실적인 선택지로 여겨졌다. 실제로 당시 미중 공동 기후 선언은 파리협정 성사의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이후 세계는 급변했다. 미중 관계는 협력에서 경쟁으로, 경쟁에서 대립으로 이동했다. 기술과 산업, 공급망, 금융과 안보가 얽히며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등장했고, 기후 역시 이 틀 안으로 흡수되었다. 태양광과 배터리, 전기차와 희토류, 전력망 장비는 더 이상 환경 기술이 아니라 전략 산업이 되었다. 기후는 협력의 언어에서 경쟁의 전장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중국은 기후 대응을 국가 산업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아 청정에너지 공급망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반면 미국은 이를 기후 문제라기보다 전략적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후 협력의 핵심 질문은 “누가 더 많이 감축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전환 산업의 표준과 공급망을 지배하느냐”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파리협정의 기본 전제였던 상호 신뢰와 점진적 상향 메커니즘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각국은 협상장에서 기후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 계산은 산업과 안보에 맞춰 돌아간다. 화석연료 문구, 기술 이전, 기후재정을 둘러싼 논의가 반복적으로 교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후 협의는 더 이상 중립적 공간이 아니다.
여기에 미국의 불연속적인 기후정책은 불확실성을 한층 키웠다. 트럼프 1기의 파리협정 탈퇴, 바이든 행정부의 복귀와 대규모 기후 투자, 그리고 트럼프 2기 는 1기 때 보다 더욱 분명한 신호를 세계에 보냈다. 기후 리더십이 국가의 장기 전략이 아니라 정권 교체에 따라 흔들릴 수 있는 선택지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외교 변수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금융시장이고, 기술 혁신과 규범 설정의 중심 국가다. 미국의 기후정책이 불안정하면 글로벌 투자와 산업 전환의 속도도 불안정해진다. 특히 개발도상국에게는 “미국의 약속은 다음 선거 이후에도 유효한가”라는 질문이 기후 협의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문제는 특정 정치인의 성향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미국 내부에서 기후는 이미 깊이 정치화되었다. 환경 이슈가 아니라 산업과 노동, 지역 정치의 문제로 얽혀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은 구조적으로 일관된 기후 리더십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태에 들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2025년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기후변화 협의는 파리협정 이후 기후 거버넌스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마존의 관문에서 열린 이 회의는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화석연료 문제에서는 끝내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는 기후 협의가 더 이상 단일한 중심축을 갖지 못한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대신 이번 협의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적응과 정의로운 전환의 부상이다. 기후변화는 미래의 위험이 아니라 현재의 피해가 되었다. 폭염과 홍수는 경제와 사회의 안정성을 직접 위협하고 있다. 감축만을 강조하는 접근은 정치적 저항을 키웠고, 이제는 피해 관리와 전환 비용의 공정한 분담이 핵심 의제가 되고 있다.
기후 거버넌스는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초기에는 국제 합의와 도덕적 압박이 동력이었다면, 이제는 산업 경쟁과 금융 규범, 기술 표준이 실제 전환을 밀어붙이는 힘이 되고 있다. 협의장은 혼탁해졌지만, 전환은 협의장 밖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만을 말하기는 어렵다. 1.5도 목표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고, 지정학적 갈등은 협력의 여지를 좁히고 있다. 기후재정에 대한 신뢰 회복도 쉽지 않다. 파리협정 체제는 유지되고 있지만, 그 추진력은 약화되고 있다.
결국 파리협정 10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협정은 실패라기보다, 안정된 패권 질서를 전제로 설계된 규범이 패권 경쟁의 시대와 충돌하며 드러낸 한계다. 문제는 협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떠받칠 세계 질서의 변화다.
이제 질문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미중 패권 경쟁과 미국 기후 리더십의 불연속성이 겹치는 상황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는 환경정책이 아니라 외교·산업·안보를 관통하는 국가 전략의 문제다.
한국은 기후외교에서 중견국으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높은 목표를 선언하는 경쟁이 아니라, 불확실한 질서 속에서도 작동하는 협력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첫째, 기후외교의 초점을 감축 목표 경쟁에서 실행 패키지 제안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력망 확충, 산업 전환, 도시 적응을 묶은 정책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국제 협력의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기후를 완충 의제로 관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을 대신해 전선을 형성하기보다, 기후가 패권 경쟁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도록 협력의 통로를 유지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셋째, 기후재정에서는 규모보다 구조로 승부해야 한다. 공공 금융과 민간 투자를 결합한 실행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고, 한국형 전력망·산업 전환 사례를 실증 사업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다.
마지막으로, 국내 정책의 일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유지되는 감축과 전환의 기본 궤적이 있어야 기후외교도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예측 가능한 정책 경로 자체가 외교 자산이 되는 시대다.
파리협정 10년은 약속의 한계를 보여준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실행의 중요성을 일깨운 시간이었다. 거창한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흔들리는 세계 질서 속에서도 전환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실천의 힘이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기후외교의 방향은 분명하다. 앞장서기보다 지탱하고, 외치기보다 작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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