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 저자가 줄곧 내면을 향했던 시선을 넓혀 밖으로 돌린 신간 『너에게 안녕을 말할 때』가 출간되었다. 작가는 ‘열심은 언젠가 보답받는다’는 믿음과 달리 더는 나아질 희망이 없고, 지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는 게 최선일 때 외면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작가는 막다른 곳에서 저자는 각자 주어진 바위를 짊어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일상 속 자신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며 사랑과 용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의 소개를 ‘중증장애아 엄마’라고 하면 누구라도 일단 멈칫해요. 아픈 쪽이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이 건드리는 측은지심이 있는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 앞에서는 그걸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얼른 말하고는 상대방 입 좀 다물게 하고 싶을 때도 있고요. (웃음) 그 엄청난 카드를 쥐고 살아가는 인생.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원하지 않았고, 해본 적도, 물어볼 곳도 없었으니까요. 제 글은 거기에서 시작했어요.
벌써 세 번째 책이십니다. 이전 책들과 이번 책 사이에 다른 점이 있을까요? 출판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셔요.
두 권의 책을 쓰면서는 중증장애아 엄마라는 카드를 뒤로 숨기고 싶었어요.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았지만, 내게는 특별한 게 있다고 외치고 싶었죠. 그 마음이 간절해 독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인정’으로만 해석했어요. 저의 ‘남다름’이 마침내 증명된 것 같아 막 신이 났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중증장애아 엄마’빨’로 쓸 수 있는 글은 거기까지였거든요. 다시 책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나서는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뒷전이었죠. 근데 투고 과정이 녹록치 않았어요. 거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면서 알게 된 거예요. 아, 그때 그 독자들의 응원은 내가 ‘마침내 책을 낸’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요. 내가 ‘중증장애아 엄마’로서의 시간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냈기에 내 이야기를 들어줬던 거구나.
여길 벗어나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허상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여길 벗어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동화극 ‘파랑새’에서 남매가 찾아다니던 파랑새가 실은 그들 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요. 글을 처음부터 다 뜯어고쳤어요. 그리고 ‘진짜 더는 못 고치겠다’ 버전으로 계약한 곳이 샘터였습니다. 대학로의 옛 샘터 사옥에 파랑새극장이 있잖아요. 우연치고는 꽤 필연처럼 느껴졌죠.
표지 그림과 본문에 삽입된 스케치 같은 그림들의 스타일이 꽤 다른데요, 혹시 직접 그리셨나요?
표지 그림은 한지민 화가의 작품 <애월> 이고요, 삽입된 작은 스케치들은 제가 그렸습니다. 스케치들은 사실, 투고 원고에 있던 그림의 일부예요. 글꼭지 사이에 그림일기를 한 점씩 넣었거든요. 진입장벽이 낮으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효과로는 최고라 하나의 심리치료도구로서 실어본 거죠. 그래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을 때 ‘그림일기가 한 건 했다’고 확신했어요. 그런데 첫 미팅 때 저희 대문자 T 편집자님의 첫마디가 ‘그거 빼자’였죠. (웃음)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되고, 글만 있을 때 더 힘있게 전달될 것 같다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세 점의 스케치가 살아남았습니다. 애월>
중의적일 듯한 제목 ‘너에게 안녕을 말할 때’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우리가 ‘관계’라 부르는 것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묻고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일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가 첫 질문이었습니다. 반복되는 억울함과 분노를 따라가니 답은 쉽게 나오더군요. 아이를 조금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저는 화를 내고 있었죠. 아이와의 관계를 도구로 삼아 통제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었던 거예요. 도를 넘은 자기애였죠.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그러고 나니 다음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내 아이를 불쌍히 여기거나 아이에게 죄인으로 사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의 삶은 없는 걸까?” 슬퍼하거나 미안해하는 것 말고, 좀 경쾌하게 살 수는 없나 싶었어요. 아무 생각없이 아이와 낄낄대며 웃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노력해도 잘 안 되더군요. 괜찮다 싶다가도 어느새 익숙한 우울함으로 되돌아오길 반복했죠. 결국 저는 제 아이보다 저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자신보다 먼저 떠날 자식을 두고 한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우는 걸 봤죠. “내가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꼭 제 마음 같아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질문이 떠오르지 뭡니까? “대신 죽는 거 말고 대신 사는 거. 너 그거도 할 수 있어?” 눈물이 쏙 들어가더군요. 그 질문에는 대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꼴값 떨지 말자 싶더군요. 아픔과 슬픔, 좌절들은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졌습니다. 아이의 아픔을 안타까워하고 아프게 낳아서 미안하다며 우는 짓을 마침내 멈추게 된 거죠. 그때부터는 아이를 사랑할 방법만 고민했어요.
이 우주에서 우리가 우연히 만나 서로 나눌 건 오직 사랑밖에 없다, 거기 닿기까지의 시간들이 책에 담겨 있고요. 그래서 제목에 ‘너’와 ‘안녕’이라는 단어를 꼭 넣고 싶었어요. ‘너’는 나 아닌 상대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저’를 지칭할 수도 있잖아요. 제 안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에 ‘안녕’이라 말하며 존중하고 싶었어요. 결국 그 모든 시간들을 거쳐 지금의 제가 되었을 테니까요.
책의 중간중간 나오는 심리상담 이론과 사유가 흥미로웠습니다. 작가뿐 아니라 상담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없으신가요?
그림일기를 쓰는 자기치유모임을 운영해보고 싶어요. 크레파스와 색연필, 연필과 지우개. 그 만만한 도구들 앞에서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거든요. 자기에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나쁜 짓 할 때 그렇지 않은 쪽보다 더 고통스럽고요. 사람들이 그림일기만 쓰고 살아도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는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은 뭐 하나를 선택하면 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밸런스 게임이잖아요. 뭘 갖고 싶고, 뭘 포기하기 싫은지 똑바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자신과 남을 괴롭히며 사는 건 줄어들겠죠. 그 활동을 언젠가 해보고 싶습니다.
신간을 기다렸다는 리뷰들이 벌써 달리고 있는데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본인 글의 매력을 꼽는다면 뭘까요? 주변 반응도 궁금합니다.
표지 그림 속 인물이 제 뒷모습과 비슷하다고 놀라워해요. 근데 팔뚝은 많이 다르다고요. (웃음) 껍질이 깨지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균열이 필요하잖아요. 반갑든 반갑지 않든, 동의하든 불편한 지점이 있든, 모든 균열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믿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글이길 바라며 썼는데, 어떻게 읽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기를 바라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잘못된 관계를 진단하는 일은 이제 너무 쉬워진 것 같아요. 정보들이 넘쳐나잖아요. 처방을 내리듯 관계를 진단하고 지속 여부를 결단하는 과정에도 대부분 의견이 합치되는 것 같고요. 하지만 어떤 관계는 끊어낼 수 없어 어떻게든 끌고 가야만 하죠.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부터가 그렇고요. 자기 자신과든, 누군가와든, 풀리지 않는 관계를 마음에 품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고 조금 가벼워지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걸 쓰고 그랬거든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Copyright ⓒ 채널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