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을 진단받은 소방공무원에게 공무상 요양급여를 지급하지 않은 인사혁신처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소방관이 장기간 화재 현장에 출동하며 유해물질에 노출된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서울행정법원 행정8단독은 소방공무원 A씨가 인사혁신처를 상대로 제기한 공무상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A씨가 수십 년간 다수의 화재 현장에 출동하며 유해물질에 노출됐고, 이로 인해 백혈병이 발병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A씨는 1995년 소방공무원으로 임용돼 약 26년간 근무하다가 2021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후 공무원연금공단에 공무상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인사혁신처는 2023년 3월 이를 불승인했다. 공무원 요양급여는 공무 수행 중 발생한 부상이나 질병으로 요양이나 재활이 필요한 경우 진료비와 치료비 등을 지원하는 제도다.
인사혁신처는 A씨가 임용 초기 약 2년 2개월 동안만 화재 진압과 구조 업무를 수행했고, 이후에는 주로 행정직이나 관리직으로 근무했다는 점을 근거로 공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화재 현장 업무를 수행한 시점과 백혈병 발병 사이에 20년 이상 시간이 경과한 점도 불승인 사유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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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A씨는 소송을 통해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개인보호장비가 충분히 지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화재 현장에 출동했고, 이 과정에서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고 주장했다. 임용 초기 이후에도 출동부서장, 당직 책임관, 소방서장으로 근무하며 현장을 직접 지휘했고, 그 과정에서 일선 소방대원과 동일하게 유해물질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인사혁신처는 당직 책임관이나 소방서장이 직접 화재 현장에 출동해 지휘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A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출동부서장 근무 당시에도 주된 업무는 행정에 가까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법원은 소방본부와 동료 소방공무원들의 진술을 근거로 인사혁신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가 근무했던 소방본부는 당직 책임관과 출동부서장이 모든 화재 현장에 출동해 지휘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동료 소방공무원들 역시 A씨가 실제로 화재 현장에 출동해 지휘와 구조 활동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
소방본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A씨는 재직 기간 동안 총 1431건의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이 가운데 당직 책임관으로 420건, 소방서장으로 69건의 출동 기록이 포함돼 있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A씨가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화재 현장에 노출됐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석유화학제품이 연소될 경우 벤젠이 방출될 가능성이 크고, 소방공무원이 화재 현장에서 벤젠에 노출되면 백혈병 발병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가족력 등 다른 발병 요인이 확인되지 않는 점도 고려 요소로 들었다.
법원은 A씨가 26년 이상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수백 차례 화재 현장에 출동했고, 이 과정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됐다고 볼 수 있다며 공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인사혁신처가 내린 공무상 요양 불승인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소방공무원의 직무 특성과 지휘·관리직 근무 중에도 화재 현장 노출 가능성을 폭넓게 인정한 사례로, 향후 유사한 공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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