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층이 도심의 아파트를 비우면 청년과 신혼부부가 들어올 여유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가격도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실을 거의 반영하지 못하는 추상적인 가설에 가깝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은퇴자는 더 이상 노동에서 물러난 사람이 아니라, 계속 일해야만 생활이 유지되는 세대다. 이런 구조를 무시한 채 단순히 나이 많은 세대가 떠나야 집값이 내려간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연령계층별 경제활동참가율에 따르면 2025년 11월 기준 60세 이상 참여율은 48.1%, 65세 이상은 41.7%, 70세 이상도 33.3%에 이른다. 은퇴 연령대에 속하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여전히 노동시장에 남아 있다는 의미다. 정년은 60세 부근에서 묶여 있지만 기대수명은 80세를 훌쩍 넘었고, 국민연금만으로는 이 긴 기간을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베이비부머 세대는 스스로를 부양하기 위해 다시 일터로 나올 수밖에 없으며, 그 일자리의 대부분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
은퇴자를 지방으로 보내자는 주장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자리가 도심에 몰려 있는데 사람만 시골로 내려보낸다고 해서 생활이 유지될 리 없다. 플랫폼 노동, 배달·돌봄·경비와 같은 서비스직, 전문 파트타임과 컨설팅 등 은퇴 후 선택할 수 있는 업종은 거의 모두 대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방에는 여전히 산업이 한정적이고, 고령층이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일자리도 적다.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서울 집값이 비싸니 내려가서 살라는 말은 사실상 소득과 기회를 포기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은퇴자를 서울 밖으로 내보내면 청년층의 주거 문제가 나아질까. 실제 시장 구조를 보면 답은 명확하다. 서울의 주택 가격을 끌어올린 가장 큰 요인은 만성적인 공급 부족, 재건축·재개발 규제, 인허가 지연, 도심 집중의 경제 구조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서울의 인구는 정체 혹은 감소했지만 가구 수는 계속 증가했고, 한 사람당 한 채가 아니라 한 가구당 한 채가 필요한 현실에서 주택 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공급 병목을 해소하지 않는 한, 세대 구성을 어떻게 바꾸더라도 가격 구조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시골로 내려가면 비용이 크게 줄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도 이미 현실과 거리가 멀어졌다. 귀촌 붐과 각종 개발 사업으로 지방 중소도시의 집값과 전세금 역시 꾸준히 상승했다. 무엇보다 고령층에게 가장 중요한 의료·교통·문화 인프라는 지방으로 갈수록 부족하다. 병원을 찾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고, 대중교통이 빈약해 자가용에 의존하다 보면 교통비와 시간 비용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의료비와 이동비의 증가는 결국 전체 생활비를 끌어올리고, 이는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시골로 간다는 애초의 목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서울 경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베이비부머 세대를 밖으로 밀어내는 발상은 위험하다. 이들은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쌓은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자영업, 프리랜서 업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 역할을 수행하는 인구 집단이 한꺼번에 줄어든다면 도심 상권과 서비스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세대 간 갈등만 심화시킨 채 경제적 활력은 약해지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은퇴자를 서울에서 내보내라는 주장은 부동산 문제뿐 아니라 도시 경쟁력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오히려 정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은퇴자가 도심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소형·중형 공공임대와 도심형 고령자 주택을 확충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도 노년층 거주자에 대한 이주 대책과 재정착 장치를 촘촘히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적정 가격의 주택 공급, 역세권 고밀 개발, 노후 주거지의 리모델링·소형화 정책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세대를 서로 밀어내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도심 안에서 서로 다른 삶의 단계가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은퇴자를 지방으로 쫓아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특정 세대의 거주를 문제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공급 정상화와 제도 개편이라는 본질적 과제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서울을 비우고 떠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 도시를 함께 유지해 온 동등한 구성원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외곽으로 밀어내려는 발상은 정책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설 자리가 없다. 서울은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와 일자리 구조를 재설계해야 하는 도시다.
|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