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주회사의 규제를 완화해 반도체 산업의 대규모 투자 환경을 정비하고,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첨단 분야의 성장 기반을 확충하는 '산업 체질 대전환'에 시동을 걸었다. 반도체·AI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기업의 투자 여력을 높이고 신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을 가동해 미래 경제 구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다.
11일 기획재정부는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국내 증손회사의 지분을 반드시 100% 보유해야 하는 현행 규제를 '50% 이상 보유'로 완화하는 방향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는 반도체를 비롯해 대규모 투자와 속도전이 필수적인 첨단 분야에서 현행 제도가 기업 구조조정과 신규 투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주회사 체제는 원칙적으로 3단계(지주회사→자회사→손자회사)까지만 허용된다. 네 번째 단계인 증손회사를 두려면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하는데, 이는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공정거래법상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 규정이 글로벌 경쟁이 빠르게 펼쳐지는 반도체 산업의 투자 구조를 경직시키고, 기술 확보 경쟁에서 민첩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복잡한 글로벌 밸류체인 속에서 다층적인 투자 구조가 불가피한 반도체 산업 특성상, 100% 지분 요건은 핵심 계열사의 신사업 투자나 해외 전략투자에 제약으로 작용해 왔다. 이번 규제 완화가 추진될 경우, SK하이닉스를 포함한 주요 반도체 기업의 투자 여력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 역시 이를 통해 "국가전략산업의 경쟁 우위를 강화하고 국내 투자 활성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다만 정부는 투기적 지배구조 확장이나 대기업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 논란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동시에 마련했다. 규제 완화는 비수도권 지역 투자와 연계해 지역 균형 발전과 함께 추진되며, 변경된 지분 구조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별도 심사와 승인을 반드시 거치도록 할 방침이다. 공정성을 확보하면서도 기업의 민첩한 투자를 유도하는 '조건부 완화' 방식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AI 산업을 성장의 핵심 엔진으로 키우겠다는 구상도 함께 제시했다. 기재부는 "AI는 반도체 산업과 맞물려 국가 경쟁력의 핵심 축이 될 것"이라며 "AI 개발·활용 기업이 나오는 산업 생태계 구축과 인프라 확충을 통해 장기적 성장 기반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AI 모델 개발, 데이터 인프라, 반도체·연산 자원 등 필수 요소를 민간 기업이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관련 제도 개선 방안을 폭넓게 검토할 계획이다.
재계에서는 이번 규제 완화가 반도체 기업의 자금조달 구조를 유연하게 만들고, 지주사 체제 아래에서 연구·개발(R&D) 및 시설 투자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반도체 산업은 초거대 AI 확산, 차세대 메모리 시장 확대 등으로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대규모 선제 투자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산업이다. 정부의 규제 완화가 국내 기업의 사업 속도와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이번 조치가 '특정 기업 지원' 성격이 아니라 산업 전반의 활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도 "이는 금융·산업 분리 원칙을 흔드는 완화가 아니며, 외국인 투자 기업에 적용되는 특례와 동일선상에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합리적 조정"이라고 설명했다.
기재부는 이번 규제 완화, 투자 활성화, 산업 생태계 재정비, 균형 발전 강화, 경제형벌 합리화 등을 포함한 이른바 '5대 패키지' 전략을 통해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업이 불필요한 규제에 발목 잡히지 않고 첨단 전략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 기반을 다지되, 공정성과 균형성은 유지하는 방향이다.
전문가들은 "지주회사 규제 완화는 단기적으로 반도체·AI 기업의 투자 구조를 유연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산업 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규제 완화에 맞춰 공정성·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감시 체계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정부는 앞으로 지주회사 규제뿐 아니라 첨단 산업 중심의 신성장 전략을 종합 지원하는 추가 방안을 순차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반도체·AI를 중심으로 한 대전환과 지역 균형 발전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정부의 전략이 국내 산업 구조 변화의 분수령이 될지 주목된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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