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의료 패턴과 책임 구조의 재정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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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의료 체계는 공통의 구조적 압박에 직면해 있다. 만성질환자 증가와 의료 인력 부족, 인구 구조 변화가 겹치며 의료비는 이미 경제 성장 속도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 역시 건강보험 총진료비가 2014년 약 54조 원에서 2023년 약 110조 원으로 늘었으며, 만성질환 고위험군의 1인당 진료비는 전체 평균의 약 세 배에 달한다. 의료비 증가 속도와 구조를 고려하면 지금과 같은 ‘악화 이후 치료’ 중심 패턴만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OECD 국가들은 의료 체계를 ‘질병 치료’ 중심에서 ‘예방·관리’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다. 특히 환자의 상태를 연속적으로 파악해 악화를 조기에 감지하는 예측형 AI 의료기기가 의료비 관리의 핵심 기제로 부상하고 있다. 의료 영상 분석 AI가 검사 효율을 높이며 의료 현장에 뿌리내렸다면, 연속 데이터 기반 위험 예측 AI는 ‘악화 이전’ 변화를 식별해 개입 시점을 앞당기는 새로운 의료 패턴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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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진단에서 연속 예측으로: 의료비 구조 변화의 출발점
기존 의료 시스템은 특정 시점의 영상·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의료비 증가의 핵심 요인인 만성질환 관리에서는 한계가 있다. 만성질환은 악화 양상이 일정하지 않아 단일 시점의 데이터만으로는 변화 흐름을 포착하기 어렵다. 이 구조적 한계는 결국 의료를 ‘악화 이후 대응’ 중심으로 고착시키며 의료비 증가로 이어진다.
환자의 ‘연속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예측형 AI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한다. 실제로 미국 메디케어(Medicare)와 JAMA·AHA 등 주요 연구에서는 원격 환자 모니터링(RPM)이 심부전·COPD 환자의 재입원율을 유의하게 낮춘 것으로 보고됐다. 예측 AI는 ‘악화 이후 치료’를 ‘악화 이전 조기 개입’으로 전환하는 기술적 기반을 제공한다.
심전도 AI: 재입원 감소가 기대되는 조기 경보 시스템
예측형 AI 가운데 가장 빠르게 확산한 분야는 심전도(ECG) 분석이다. 국내에서도 다수 병원이 AI 기반 판독 보조를 진료에 적용하고 있으며, 일부 기관은 수년간 축적된 실사용 데이터를 토대로 부정맥 발생 위험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심부전·부정맥 등 심혈관 질환은 재입원율이 높고, 악화 시 의료비 증가 폭이 큰 대표적 고비용 질환이다. AI 기반 심전도 분석은 단순 판독 정확도 향상을 넘어, 위험 환자를 조기에 식별해 약물 조정이나 외래 조기 방문 등 선제적 개입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예측형 모델은 성능 개선을 위한 업데이트가 필수적이지만, 현행 SaMD 규제는 ‘고정된 알고리즘’을 전제로 설계돼 있어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검증·관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실시간 경보의 정확도·오탐 대응, 알고리즘 변경 시 확인해야 할 범위 등은 의료진과 규제당국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연속 혈압·활동 모니터링: 외래 진료 공백을 메우는 데이터 기반 관리
혈압·활동 데이터를 연속적으로 수집하는 기술도 확산하고 있다. 특히 고혈압·심혈관 위험군에서 혈압 변동성(BPV)은 주요 사건 위험을 높이는 요인으로 다양한 국제 연구에서 제시됐지만, 기존 병원 진료만으로는 일상에서의 변화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시계·반지 등 다양한 형태의 웨어러블 기기 등장은 외래 진료 사이 공백을 메우는 ‘일상 기반 데이터’ 활용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재활 영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절골술·고관절 치환술·뇌졸중 환자에게 중요한 보행 패턴 변화는 기존 방식으로는 정량화가 어려웠지만, 최근 AI 기반 보행 분석 솔루션과 재활 로봇이 도입되면서 보행량·속도·균형 변화 등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재활 기간 단축과 치료 효율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예측 AI 도입의 역설: 의료 현장에서 증가하는 업무 부담
예측형 AI는 비용 효율성과 관리 정확도 향상을 기대할 수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업무 부담 증가라는 역설적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이 도입되면 의료진이 확인·관리해야 하는 데이터양은 급격히 늘어나지만 인력 규모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 늘어난 데이터를 언제·누가·어떤 기준으로 처리할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다.
또한 새롭게 추가되는 디지털 시스템이 기존 병원 워크플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오히려 업무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 임상에서는 AI 경보가 발생할 때마다 의료진이 오탐·누락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해 ‘경보 피로(alert fatigue)’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기술 신뢰도 자체가 저하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기술 성능과 별개로, 병원 워크플로 통합과 인력 부담 완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예측형 AI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예측 AI가 의료 시스템 안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업무 체계의 재설계가 필수적이다.
새로운 의료 패턴의 전환점: ‘악화 이전 개입’이라는 방향성
예측·연속 모니터링 기반 AI 의료기기는 의료의 무게중심을 ‘치료 이후 관리’에서 ‘악화 이전 개입’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의료진은 특정 시점의 결과가 아니라 환자의 변화 흐름을 바탕으로 개입 시점과 강도를 조정할 수 있게 되며, 환자 역시 병원 밖에서 생성되는 데이터가 진료의 핵심 근거로 활용되면서 더 능동적인 관리 주체가 된다.
의료비 증가가 불가피한 구조 속에서 예측형 AI는 지속 가능한 의료 시스템을 위한 현실적 해법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춘 규제와 책임 구조의 정비가 병행된다면, 예측 AI는 의료비 구조 전환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디지틀조선일보 창립 30주년 특집 ‘에이지테크 시리즈’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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