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정치적 방독면 필요한 곳" 역사적 복잡성
"겹겹 방어선 내주면 진격 발판…푸틴, 우크라 유럽행 다리로 여겨"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재하는 종전 협상의 핵심 쟁점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강력히 요새화하고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지역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1일(현지시간) 러시아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약 25% 남은 도네츠크주와 약간 남은 루한스크주에서도 철수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이 협상을 엎어버릴 수 있는 중대 사안이라고 전망했다.
돈바스 면적은 잉글랜드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고, 남한 면적의 절반을 약간 넘는다. 소련 시절에는 탄광과 금속 제련소가 즐비한 산업 중심지였다.
언어, 문화, 이념이 복잡하게 얽혀 지역 외부 세력이 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21년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돈바스는 독성이 너무 강해 이를 다루려면 '정치적 방독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돈바스 전체 점령은 포크로우스크, 코스티안티니우카, 드루즈키우카, 크라마토르스크, 슬로비안스크를 잇는 대러시아 저지선 '요새 벨트'의 장악을 의미한다. 러시아는 2014년 이후로 막대한 군사적 비용을 쏟아부으며 돈바스 정복에 나섰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요새 벨트는 절벽과 협곡 등 지형에 따른 자연 방벽에 인공 채석장과 '용의 이빨'로 불리는 돌덩이, 철조망, 참호, 지뢰밭이 더해지며 겹겹이 형성된 방어선이다. 그 서쪽에는 트인 들판과 인구가 적은 지역이 펼쳐진다. 요새 벨트만 넘으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깊숙이 진격하기가 수월해진다는 뜻이다.
속도가 더디기는 하지만, 공세를 쏟아부으면서 러시아군은 요새 벨트 도시 곳곳에서 나아가고 있다. 포크로우스크를 장악했다고 주장하며 코스티안티니우카 남쪽 입구에도 거의 도달한 것으로 분석된다.
우크라이나도 방어에 필사적이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국방비 10억 달러(1조4천700억원)의 상당 부분이 돈바스에 집중됐다.
협상을 중재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영토 양보를 최근 몇 주간 종전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으로 여기고 우크라이나 측을 압박했다고 전해진다.
올해만 6차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스티브 윗코프 미국 특사는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 나머지 영토를 러시아에 넘겨주기만 하면, 공정한 평화가 달성되며 전쟁이 더 길어지는 걸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 2명이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빼앗기지도 않은 영토를 그냥 내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며, 많은 유럽 당국자와 군사 전문가도 이에 동의한다.
미콜라 비엘리에스코우 컴백얼라이브 선임 분석가는 트럼프 행정부는 양쪽 입장차를 좁힐 최선의 방안이 우크라이나의 철수라고 보는 듯하지만, 우크라이나로선 물렁물렁하게 합의했다가는 다른 영토까지 러시아군에게 활짝 열어놓는 꼴이자 국내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처음 내놓은 28개항 종전안 초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에서 철군하고 '중립적이고 비무장인 완충 지대'를 만드는 방안이 포함됐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지대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반도식 DMZ는 러시아에 재침공을 준비할 시간만 벌어주고 분쟁 상태가 계속될 우려가 있다며 회의적이다.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기 위해서라면 우크라이나에 서방 군이 주둔하는 것 등 서방의 강력한 안전 보장이 필요한데, 이는 러시아가 절대 불가를 선언한 것이고 현재 종전안에도 담겨 있지 않다.
또 최근의 종전안에는 이 DMZ의 동쪽 지역에서 러시아가 철군한다는 내용도 없다고 한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는 전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 파트너, 전문가들은 2014년과 2015년의 1, 2차 민스크 협정에도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20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우크라이나 시민자유센터의 올렉산드라 마트비이추크 대표는 "민스크 협정 후 8년을 푸틴은 어떻게 썼나?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전면 침공의 군사 기지로 바꿔놨다"며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유럽으로 향하는 다리로 여긴다.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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