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엔 지퍼를 무조건 반만 올려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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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엔 지퍼를 무조건 반만 올려야 하는 이유

엘르 2025-12-11 17:44:42 신고

얼마 전 뉴욕에 다녀왔다. 역시나 지하철에 당도하자마자 목격한 건 이름 모를 부랑자가 선로 위를 비틀거리며 가로지르는 광경이었다. 또 어느 날엔 한 인류애 충만한 악사가 아름다운 선율로 지하철의 스산한 공기를 덥혔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심란해지지만, 오직 도시 중의 도시만이 선사할 수 있는 커다란 설렘이 샘솟는 곳. 뉴욕 지하철은 그런 곳이다. 전 세계 대중교통의 인간군상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뉴욕은 확실히 어떤 상징에 더 가깝다. 마티유 블라지마저 그의 첫 번째 샤넬 공방 컬렉션을 위해 기꺼이 이곳으로 향했으니 말이다. 절망과 환희가 잔뜩 뒤엉킨 가장 뉴욕다운 무대로!


인도인 최초로 샤넬 공방 컬렉션의 오프닝 룩을 장식한 모델 바비타 만타바

인도인 최초로 샤넬 공방 컬렉션의 오프닝 룩을 장식한 모델 바비타 만타바

쇼의 시작은 장소만큼이나 강렬했다. 모델 바비타 만타바는 인도인 최초로 샤넬 공방 컬렉션의 오프닝 룩을 도맡았다. 뉴욕 지하철에서 마티유 블라지에게 직접 캐스팅된 만타바는 그의 샤넬 데뷔 쇼에도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호화로운 샤넬 공방 컬렉션과 뉴욕 지하철, 인도인 모델의 생경한 조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타바가 걸친 건 아빠의 옷장에서 막 꺼낸 듯 푸근한 쿼터 집 스웨터였다. 마티유 블라지 역시 피날레에 쿼터 집을 입고 등장했다. 아웃도어 매장이나 아울렛 매대에 무한히 깔려 있는 지루하고 칙칙한, 바로 그 쿼터 집 말이다.


지퍼를 4분의 1 지점까지만 여닫을 수 있다는 뜻의 쿼터 집은 지금 조용히 전성기의 시작을 맞이했다. 지난 11월, 뉴욕 틱톡커 제이슨 자얌피는 “나이키 테크 대신 쿼터 집을 입고, 커피 대신 말차를 마신다”라는 영상을 업로드했고, 반응은 뜨거웠다. 조회수는 약 3천 만회를 돌파했으며, 이토록 당돌한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댓글은 무려 2만 개를 넘어섰다. 에코백을 멘 채 줄 이어폰을 꽂고 카페에서 말차를 마시는 남성, 이른바 ‘퍼포머티브 메일’을 구성하는 요소에 쿼터 집이라는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풀 집과 쿼터 집의 차이다. 플리스나 스웨트셔츠, 아노락처럼 스포티한 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쿼터 집의 미학은 오로지 반만 올렸다 내릴 수 있는 번거로움에 있다. 내가 처음으로 쿼터 집의 매력에 눈을 뜬 건 꽤나 어릴 적 이야기다. 태어날 때부터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답게 ‘키위(뉴질랜드인을 일컫는 별명)’들은 소문대로 정말 맨발로 보도블럭을 누볐다. 여름엔 웃통을 벗은 채 깨끗한 잔디밭에 벌러덩 눕기 일쑤였고, 겨울엔 패딩과 쪼리라는 기상천외한 조합을 대수롭지 않게 소화했다. 이름처럼 실로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특히 내 관심을 끈 건 같은 반 남자애가 교복 위에 자주 입던 쿼터 집이었는데, 간편한 풀 집 후디를 두고 굳이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그 수고로움이 왠지 모르게 쿨해보였다. 반드시 머리 위로 완전히 벗어야 하는 탓에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지는 것도, 안에 받쳐입은 티셔츠가 삐뚤빼뚤하게 말려 올라가는 것도 전부 개의치 않았다. 마저 벗다 말고 어깨에 무심하게 걸쳐 둔 모양새마저 구조적인 머플러를 두른 듯 근사했다.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육시간에도 덥거나 추울 때면 몇 번이고 파타고니아의 바스락거리는 아노락 윈드스토퍼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지퍼를 쭉 내리기만 하면 그만인 풀 집의 효율적인 면모에만 집착하던 나 자신이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샤넬 2026 공방 컬렉션

샤넬 2026 공방 컬렉션

샤넬 2026 공방 컬렉션에 참석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싱어송라이터 솔란지 노울스

샤넬 2026 공방 컬렉션에 참석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싱어송라이터 솔란지 노울스

귀찮고, 어딘가 삐딱한 매력의 쿼터 집은 그 의미 역시 전복적이다. 증권가 종사자나 재미없는 삼촌이 입을 법한 노블한 아이템이 가장 극적인 런웨이 위로 올라섰으니 말이다. 마티유 블라지는 우아한 스커트와 스틸레토 힐 위로 다른 무엇도 아닌 블랙 하프 집과 흰 티셔츠를 더했다. 근 몇 년간 런웨이를 지배한 조용한 럭셔리의 절제된 미학이 다시금 굳건해지는 순간이었다. 마티유 블라지가 제안하는 새로운 여성상이란 이런 모습이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쿼터 집에 샤넬 백을 걸친 채,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인 지하철을 당당히 누비는 여성. 쿼터 집은 샤넬과 지하철이라는 극단적인 럭셔리와 리얼리티를 단숨에 하나로 잇는다. 도시의 복잡다단한 계층은 지하철 플랫폼 앞에서 일제히 평등해진다. 동시에 쿼터 집은 그 중간 지점을 교묘하게 비튼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원마저 원한다면 언제든 기어코 패션으로 승화해버리는 여성을 내세우면서. 그러니 여성들이여, 올겨울에는 지퍼를 꼭 반만 올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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