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서 외면받는 과학”…독성학 연구자, AI 중심 R&D의 그늘을 말하다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불편해서 외면받는 과학”…독성학 연구자, AI 중심 R&D의 그늘을 말하다

이데일리 2025-12-10 18:19:06 신고

3줄요약
[이데일리 강민구 기자] “정부 연구비가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 연구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없습니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 분야로 예산이 쏠리면서, 국민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독성학 연구는 연구실 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박은정 경희대 의대 교수는 지난 5일 경희대에서 진행한 이데일리 인터뷰에서 정부 R&D 예산이 확대됐음에도 기초·중견 연구자들이 AI·빅데이터 중심 지원 체계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박 교수는 출산과 가족 간병으로 경력이 단절된 뒤 42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만학도다. 10년간 비정규직 연구원 생활을 거쳐 2017년 경희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가습기 살균제와 생활화학제품 독성 연구를 꾸준히 이어왔다. 특히 2016년부터 3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 연구자’(클래리베이트 선정)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적 독성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벅은정 경희대 의대 교수가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독성연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경희대)


◇일곱 번 탈락 후 과제 수주…힘겹게 연구실 유지

박 교수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수로 부임했지만, 부임 후 5년간은 연구실 운영조차 버거웠다고 설명했다. 독성 연구 본연의 특성에다가 내외부적인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독성 연구는 산업계의 이익에 상반된 연구 분야로 치부되다 보니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 즉 ‘불편해서 외면받는 과학’으로 불린다.

그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기초연구(중견연구자) 지원 사업에서 일곱 번 연속 탈락하면서 부임 후 5년간 제대로 된 연구비 없이 버텨야 했다. 교수로 부임하며 받은 학교 지원금 1억원으로 주요 기자재는 구입했지만, 시료를 분석하는 데 필요한 항체나 시약 등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2022년에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서 주관하는 사업 지원을 받아 위기는 면했지만 이어진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폭풍은 피할 수가 없었다.

새 정부에서 다시 신진연구자 대상 지원을 강화하고 전체 R&D 예산도 회복시켰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 교수가 이미 중견 연구자가 된데다 호흡기 독성·생활화학제품·환경성 질환 같은 분야도 현 정부에서는 ‘AI를 끼지 않으면 과제가 안 되는’ 구조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활독성 분야는 오래전부터 돈이 안 되는 분야로 분류돼 연구자들이 피하던 분야다. 가습기살균제 사건 이후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환경부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됐지만, 소수 연구자에 의해 연구가 수행돼 데이터가 거의 없다. 당장 학습에 필요한 신뢰도 있는 데이터가 없어 AI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셈이다.

중견 연구 과제에만 일곱 번 탈락한 박 교수는 3년 동안 준비 기간을 거쳐 지원한 중견 연구자 과제에 결국 선정되면서 지난 9월에서야 중견 연구자 대열에 합류했다. 연구비를 수주했지만 실제로 손에 쥔 것은 7000만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대학원생 1명 인건비와 간접비를 빼고 나면 재료비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은 4000만원도 남지 않는다.

박 교수는 “연구비가 끊겼던 기간 동안 외부 활동비와 월급에서 학생 인건비와 재료비를 충당해야 했다”며 “지금도 실험실에는 사비로 구입한 장비들이 남아 있는데 지인들을 통해 저의 소식을 들은 분들이 실험대와 1회용 소모품 등을 기부해서 심리적으로 버티고, 연구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의 어려움에 실험실의 실험대와 1회성 소모품 등을 주변에서 기부해줘서 실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사진=경희대)


◇어려움 딛고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는 연구’ 목표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박 교수가 연구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독성 연구가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수 분야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성장과 국민 건강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추구해야 할 축이라며,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위한 연구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 가족의 응원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 교수가 독성학 실험실에 입문한뒤 1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 식도암을 앓은 시아버지가 폐혈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후 14년을 남편이 직장을 포기하고 간병을 해야 했다. 남편이 박 교수에게 준 숙제는 단 하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족은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박 교수는 1주일에 3-4일씩 밤샘 실험을 하며 세계적 연구자로 성장했다. 그의 경험은 만성질환, 환경 유해 인자의 영향을 더 깊이 살펴보고, 폐섬유증·폐암 가능성과 흡입 독성 구조를 밝히는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박은정 경희대 의대 교수는 42세에 박사학위를 받은뒤 건양대, 아주대 등에서 비정규직 연구원을 지낸뒤 경희대에 부임했다. 부임 이후 클래리베이트 평가 등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사진=경희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더 나아가 생활 독성 연구를 파고들게 된 이유가 됐다. 이 사건으로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고, 기업과 정부의 갈등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16년 미국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방문연구자로 연구하던 당시 그는 TV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발생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박 교수는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했고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나 자신은 나노독성 연구만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귀국후 가습기 살균제 관련 연구를 하면서 생활독성 연구의 필요성을 차츰 인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폐섬유증, 폐암 관련 독성 연구를 지속해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꿈을 갖고 있다. 앞으로 특정 상황에서 세포가 손상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비정상적으로 쌓이는 지표인 ‘라멜라 바디(Lamellar body)’ 관련 연구를 통해 퇴직 전 특발성 폐섬유증의 원인만큼은 반드시 찾겠다고 다짐한 약속을 지킬 계획이다.

박 교수는 “시류에 따라 연구 주제를 바꾸면 더 큰 연구비를 수주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본연의 연구를 선택했다”며 “내가 원하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라멜라 바디’ 지표와 관련해 나노물질, 생활화학제품 속 성분, 미세먼지 등 더 많은 환경 유해 인자를 가지고 실험을 해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은정 경희대 교수는

△동덕여대 건강관리학과 학사 △동덕여대 약학대학원 석·박사 △현 경희대 의대 교수 △현 경희대 환경독성보건연구센터장 △산업기술통상자원부 국가참조표준센터 호흡기 안전성 데이터센터장 △지식창조대상(2015년) △클래리베이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 연구자’(2016년~2018년)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