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 '주 35시간제'를 앞세운 강성 지도부가 등장하면서 산업계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 최대 단일 사업장 노조인 현대차 노조가 임금·근로시간·퇴직금 체계를 전면 재편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완성차는 물론 제조업 전반에 '경쟁력 약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생산성·비용 구조 개선 논의 없이 강경 노조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될 경우 산업 현장은 또 다른 충격을 맞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 35시간 논의 본격화"…강성 노조의 '속도전'에 제조업계 긴장
10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제11대 임원 선거에서 이종철 후보가 54%를 넘는 득표율로 새 지부장에 당선되면서 현대차 노조의 기조는 '강경 노선'으로 선회하는 분위기다. 이 신임 지부장은 주 35시간 근로제 도입, 퇴직금 누진제, 임금피크제 폐지, 상여금 800% 쟁취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취임 즉시 전담팀을 꾸려 주 35시간제 논의를 본격화하겠다고 예고했다.
주 35시간제의 골자는 현재 주 40시간인 근무 시간을 연구·일반직과 전주공장부터 우선 35시간으로 줄이고 이후 다른 공장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연구·사무직은 사실상 '주 4.5일제'에 가까운 형태로 생산직은 하루 1시간씩 근무시간을 줄이는 방안이 거론된다. 여기에 근속연수에 따라 퇴직금을 최대 7개월분까지 누진 적용하고 각종 수당과 상여금을 대폭 끌어올리겠다는 구상까지 나오고 있다.
문제는 현대차 노조가 국내 제조업을 대표하는 '상징 노조'라는 점이다. 노조 조직력과 협상력이 막강한 현대차에서 근로시간 단축과 퇴직금 누진제와 같은 강경 요구가 관철될 경우 완성차·조선·철강·전기전자 등 다른 대기업 노조도 비슷한 요구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노조 요구의 상향 평준화, 교섭 의제의 확산이 산업 전반의 인건비 구조를 단기간에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인 현대차가 설비·자동화 투자와 인력 충원을 통해 일정 부분 충격을 감수하더라도 중견·중소 부품사와 하청업체들이 이를 따라가기에는 현실적 한계가 뚜렷하다. 이미 납품단가 인하, 원자재 가격 변동, 환율 리스크 등에 시달리는 1·2차 협력업체들 입장에선 인력 충원과 교대조 확대를 위한 추가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인력난으로 인한 생산차질을 겨우 메워가는 상황에서 '임금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이 현실화되면 부품사들은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거나 생산량 자체를 줄이는 선택지 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노동시간 단축은 곧 인건비 상승과 고정비 확대, 단위 제품당 원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차량 가격 경쟁력 약화와 수출 경쟁력 둔화로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몇 년 사이 국회와 정부를 중심으로 친노동 입법이 잇따라 추진된 점도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다. 노조의 손해배상 책임을 완화하는 노란봉투법, 주 4.5일제 도입 로드맵, 각종 근로시간 규제 강화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기업 입장에선 노사 교섭의 지형 자체가 노동계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생산성·구조개혁 없이 시간만 줄이면…"주 4.5일제, 한국 경제에 역풍 우려"
주 4.5일제 도입의 취지 자체만 놓고보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보이지만 경제 현장의 계산은 다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 속도를 크게 앞질렀다. 임금은 오르는데 생산성은 제자리거나 더디게 오르는 구조에서 근로시간까지 줄어들면 기업의 '단위 시간당 인건비'는 치솟고 수익성은 빠르게 악화될 수밖에 없어서다.
이에 전문가들은 현대차 노조의 주 35시간제 요구와 정부 차원의 주 4.5일제 로드맵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 상황을 두고 노동시간 단축의 순서를 거꾸로 밟고 있다는 우려가 새어나온다. 주 5일제 도입 당시에는 '일자리 나누기', '고용 확대'라는 명확한 정책 목표 아래 공공부문 시범 도입, 단계적 확대, 법 제도 정비 등 비교적 긴 호흡의 사회적 논의가 뒤따랐다.
반면 지금의 주 4·4.5일제 논의는 '삶의 질 향상'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앞세운 채 임금체계 개편·업종별 특성·중소기업 수용력 등 구체적 설계 논의가 충분히 쌓이기 전에 정치·노조 차원에서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외 사례 역시 경고 신호에 가깝다. 북유럽과 일본, 영국 등에서 주 4일제·단축 근로제를 시범 도입한 기업이나 지방정부 상당수가 인건비 급증, 인력 충원 부담, 고객 응대 차질 등을 이유로 다시 기존 체제로 돌아갔다. 단기적으로는 직원 만족도와 업무 집중도가 높아지는 듯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추가 인력 채용에 따른 비용 증가와 생산·서비스 차질을 감당하지 못해 제도를 접은 사례가 적지 않다.
선택근로제·탄력근로제·시차 출퇴근제·재택·하이브리드 근무 등 이미 제도적으로 마련된 유연근무제의 실질적 활용, 성과·역량 기반 임금체계 전환, 자동화·디지털 전환(DX)을 통한 공정 효율화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 단축만 정책 목표로 삼을 경우 그 부담은 온전히 기업과 협력업체, 나아가 청년층 신규 고용 축소라는 형태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생산성과 임금 구조에 대한 냉정한 진단 없이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정치·사회적 슬로건만 앞세우는 이중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며 "지금과 같은 방식의 속도전과 힘겨루기로는 '주 4.5일제 시대'를 향한 사회적 신뢰와 산업 경쟁력도 함께 잃을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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