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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만든 의사는 괜찮다?…모호했던 법적 정의
10일 정부가 ‘AI 등을 활용한 시장 질서 교란 허위·과장광고 대응 방안’을 내놓은건 그동안 법적 근거가 모호해 AI 허위 광고를 즉각 제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행 식품표시광고법이나 화장품법 등은 의사나 약사 같은 전문가가 제품을 추천하거나 보증하는 식의 광고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전문가의 권위를 빌릴 경우 소비자가 해당 제품을 의약품으로 오인하거나 효능을 맹신할 우려가 커서다.
문제는 기존 법 조항들이 모두 ‘사람(자연인)’을 전제로 해석돼 왔다는 점이다. 영상 속 인물이 실제 의사가 아닌 AI로 생성된 가상 인물일 경우, 현행법을 적용하기 어려웠다. 현장에선 “가짜 의사라도 소비자가 진짜로 오인하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명확한 법적 근거가 부족해 단속에 혼선을 빚어왔다.
게다가 영상을 유포하는 유튜버 등 ‘게시자’에게는 AI 생성물임을 표시할 법적 의무조차 없었다. 2026년 시행될 AI기본법 역시 AI를 개발하고 서비스하는 ‘AI 사업자’에만 표시 의무를 부과할 뿐, 기술을 악용해 영상을 제작·유포하는 일반 사용자를 규제할 조항은 빠져 있어 한계가 명확했다.
식·의약품 심의에 평균 52일 소요…거북이 절차
설령 위법성이 확인된다 해도, 영상을 차단하는 절차 또한 발목을 잡는다. 현행법상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온라인상의 불법 정보를 심의해 차단할 수 있으나, 위원 소집 없이 서면(전자)으로 즉시 심의할 수 있는 대상은 ‘디지털 성범죄물’로 한정돼 있다. 식·의약품 허위 광고가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사안이라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위원들이 대면 회의를 거쳐야 하는 일반 심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당국에 따르면 식약처의 온라인 식.의약품 등 부당광고 적발 건수는 2023년 5만9088건에서 2024년 9만6726건으로 급격히 늘어난 반면, 식약처의 차단 요청 건에 대한 방미심위의 평균 심의 소요 기간은 지난해 기준 52.1일에 이른다. AI 기술은 실시간으로 영상을 확산시키는데, 규제 당국은 물리적 시간이 소요되는 심의 절차 탓에 피해를 막을 ‘골든타임’을 놓치는 구조였던 셈이다.
표시하고, 삭제하고, 물어낸다…정부의 3단계 초강수
이에 정부는 무너진 시장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AI 생성물 표시 의무 △24시간 내 신속 차단 △최대 5배 징벌배상으로 이어지는 3단계 규율 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우선 AI가 생성한 전문가라도 식·의약품을 추천하는 광고는 금지하고, 규제 사각지대였던 유튜버 등 게시자에게 AI 생성물 표시 의무를 부과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사전 차단한다.
현행 성범죄물에만 적용되던 서면 심의 대상은 식·의약품 허위 광고까지 확대해, 차단 속도를 기존 두 달에서 24시간 이내로 획기적으로 단축한다. 더 빠른 대응을 위해 심의 전이라도 방송통신위원회가 플랫폼에 긴급 시정 요청을 할 수 있는 절차도 도입된다.
나아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 고의적인 허위 정보 유포자에게 실제 손해액의 최대 5배를 물리기로 했다. 불법 광고로 얻는 수익보다 걸렸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을 훨씬 크게 만들어 경제적 유인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취지다.
관건은 ‘해외 플랫폼’ 협조…“정부의 강력한 시그널 필요”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이 그간의 입법 공백을 메웠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실효성은 결국 ‘해외 플랫폼’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봤다. 문제의 광고가 주로 유통되는 유튜브·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글로벌 플랫폼이 정부의 시정 요구에 어느 정도 협조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자율 규제 협의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해외 사업자가 본사 가이드라인이나 기술적 한계를 이유로 차단을 늦출 경우, 국내법만으로 이를 강제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법정책센터장(교수)은 “법이 시행되면 해외 플랫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겠지만, 실제 집행 단계에서 이들이 국내 기업만큼 신속하게 대응할지는 미지수”라며 “입법으로 끝낼 게 아니라,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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