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글라데시는 이미 국토의 20퍼센트 이상이 상시 침수 위험에 놓여 있다
방글라데시는 단 한 번도 세계 질서를 좌우해온 강대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언제나 주변부였고, 지금 그 ‘주변부’라 불리던 남아시아의 작은 해안 국가에서 인류 공동의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이미 국토의 20퍼센트 이상이 상시 침수 위험에 놓여 있다.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리는 거대한 강의 분지 위에 세워진 나라가 기후 위기의 파고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예고돼 왔지만, 그 속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다.
적어도 3,000만 명 이상이 향후 30년 안에 이주해야 하는 ‘기후 난민’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 이동 중 하나가 조용히 준비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단순한 홍수나 해수면 상승에 그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의 위기는 기후 자체의 변화보다 그 변화가 가져올 정치적·경제적 파급력이 훨씬 더 위험하다. 방글라데시는 이미 미국, 유럽, 일본 등 글로벌 섬유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세계 패션 산업을 떠받치는 값싼 노동력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안 도시가 무너지고, 전력망이 침수되고, 노동자들의 거주 지역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이 산업 구조는 한순간에 균열을 맞는다. ‘싸고 빠른 패션’을 위해 구축돼 온 글로벌 공급망은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를 드러내는 중이다.
여기서 시야를 확장하면, 대서양에서도 다른 형태의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북대서양의 순환 흐름(AMOC, 대서양 자오선 역전 순환)이 약화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른다. 단순히 과학 커뮤니티의 우려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이 순환은 사실상 북반구 기후의 혈류와도 같으며, 유럽의 온난한 겨울과 북미 동부의 안정적 기후를 유지하는 숨겨진 엔진이다. 만약 순환이 급격히 둔화하거나 멈추게 되면, 서유럽은 냉각을 맞고 북미는 이상기후를 반복하며, 사하라 일대의 강우 패턴까지 뒤바뀌게 된다. 이는 경제, 정치, 식량 안보 등 모든 영역과 직결된 구조적 충격이다.
방글라데시의 침수 위기와 북대서양의 순환 약화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벌어지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공유한다. 지구 시스템이 임계점에 접근할 때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스템이든 한계를 넘어서기 직전에는 변동성이 커지고, 예측 불가능한 패턴이 등장하며, 작은 변화가 큰 영향을 가져온다.
기후는 지금 바로 그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만성 침수와 대서양의 급격한 수온 변화는 하나의 동일한 메커니즘의 양쪽 끝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이다.
이 변화는 곧 인구 문제로 돌아온다.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할 기후 난민 수백만 명이 이동하기 시작하면, 아시아 지역의 노동시장과 정치 구조는 새로운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가까운 인도는 이미 자국 내 힌두 민족주의 강화를 명분으로 무슬림 난민을 제한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방글라데시 난민 유입은 국경 지역 긴장과 종교 갈등을 재점화할 수 있다. 미얀마 로힝야 사태가 한 국가의 소수민족 박해를 넘어 국제 정치 문제로 비화한 것처럼, 방글라데시 난민 문제 역시 국제 사회가 외면할 수 없는 형태로 커질 가능성이 높다.
유럽 역시 대서양 기후 변화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AMOC의 약화는 유럽 남부의 가뭄을 심화시키고 농업 생산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식량 공급망을 흔드는 동시에 인구 이동을 부추긴다.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서 이미 높은 수준의 이주 압력이 관측되고 있는데, 기후 변화가 그 속도를 배가할 것이다. 바다는 단순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구조와 경제 구조, 그리고 정치 질서까지 뒤흔드는 촉매다.
문제의 핵심은 이 모든 흐름이 개별 국가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가 자체적으로 기후 적응 비용을 감당할 능력은 없다.
대서양을 둘러싼 유럽과 미국도 기후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한 근본적 조치를 단독으로 해낼 수 없다. 국제 협력 체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지만, 지금 세계 질서는 협력보다는 이해관계의 충돌에 익숙해져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는 기후 위기 대응을 ‘협력의 장’이 아닌 ‘패권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방글라데시가 처음 침수될 때, 유럽은 여전히 온난한 겨울을 즐기고 있을 수 있다. 북대서양의 순환이 둔화할 때, 아시아는 폭염과 홍수를 반복하며 일상의 붕괴를 경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은 시차만 있을 뿐 마지막에는 세계를 동일한 곳으로 이끈다. 공급망이 흔들리고 인구의 이동이 가속화되고 국가 간 신뢰가 약화되면, 기후 위기는 국가 간 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 시작한다. 물 부족, 식량 생산 감소, 난민 문제는 이미 주변부에서 충돌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머지않아 중심부까지 파고들 것이다.
▲ 대서양 자오선 순환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 과학자들은 논의하고 있는데 이 급격한 냉각이 대서양 자오선 순환(AMOC)의 붕괴와 관련이 있을 수 있어(사진=MBC 유투브 화면 캡쳐)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의 속보’가 아니라 ‘구조의 독해’다.
방글라데시는 기후 위기의 현장 중 하나이지만, 그 자체로 세계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리트머스다. 대서양의 순환 약화 역시 단일 현상이 아니라 지구 시스템의 균열을 보여주는 징후다. 기후는 더 이상 미래의 위기가 아니라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재편하는 중심축이다.
세계는 오래전부터 중심부와 주변부를 나누고 주변부의 고통을 비용 절감의 수단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기후 위기는 더 이상 그런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하는 침수는 유럽인의 겨울 난방 문제와 연결되고, 대서양의 순환 변화는 아시아 농업 생산성의 붕괴와 맞닿아 있다. 바다는 경계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물결은 하나의 행성 위에서 함께 움직이고 동일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전달한다.
▲ 바다수위는 높아지고 히말라야 지역의 민물은 늘어나서 진태양난에 빠진 방글라데시
결국 남는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는 이 위기를 ‘국가 단위의 위험’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구 시스템의 전환 신호’로 읽을 것인가.
방글라데시는 이미 미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서양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위기의 첫 신호는 언제나 가장 취약한 곳에 먼저 도착한다.
그 신호를 듣느냐 외면하느냐가 앞으로의 세계 질서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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