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강지호 기자] 정부의 압력 속에 배포를 금지당하고 감독은 노동 수용소까지 갔어야 했던 ‘세상에 없던 영화’가 56년 만에 최초 개봉한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최고작이자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 작품은 이름조차 검열돼 그 존재조차 지워질 뻔했던 영화 ‘석류의 빛깔’이다.
지난 1969년 개봉했던 영화 ‘석류의 빛깔’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아르메니아의 음유시인 사야트 노바의 인생과 그의 시들 속에 감독 개인의 철학과 영화관, 그리고 아르메니아 전통문화를 풀어내 빚어진 작품이다.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4K 복원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국내에서는 56년 만에 최초 개봉하며 영화 팬들 사이에서 관심을 모았다.
예술성이 강한 영화임에도 ‘석류의 빛깔’은 개봉 5일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이후 ‘석류붐’이라는 입소문과 함께 BTS RM의 관람 인증으로도 화제가 됐다.
▲ 영화는 이름을 잃었고, 감독은 세월을 잃었다…역사에 남을 상징성
‘석류의 빛깔’은 이 작품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은 이 영화의 이름을 ‘사야트 노바(노래의 왕)’라고 지었으나 검열관들에 의해 본래 이름은 박탈됐고 감독의 걸작은 ‘석류의 빛깔’이라는 임의의 이름으로 반세기 넘게 불리게 됐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정체성을 빼앗기는 것과도 같다. 이 작품이 검열 속에 세상에 공개될 기회를 잃고, 유망했던 감독의 미래와 세월까지 모두 앗아가게 된 비운의 이야기에도 바로 이 정체성이 깊게 얽혀있다.
아르메니아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 아루틴 사야딘의 일생을 그린 ‘석류의 빛깔’은 소재부터 당시 소련 공산당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했다. 감독인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역시 아르메니아인으로서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영화는 아르메니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색채로 만들어졌고 이 작품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민족주의적 요소를 탄압하는 강력한 정부의 압박 속에 작품은 이름을 잃었고 결국 감독은 영화의 7분가량을 수정한 ‘석류의 빛깔’을 선보이길 택했다. 하지만 해외 시장에는 공개되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에 대한 정부의 감시는 더 강화됐다.
이후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엄격한 감시 속에 외설 혐의로 체포됐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는 계속해서 수감과 투옥을 당했고 역사에 남은 전설적인 아르메니아 감독은 17년간 영화를 찍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 보수주의 대신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을 택하며 세르게이 파라자노프가 빛을 볼 기회가 오는 듯했으나 그는 결국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6세. 당시 그는 자신의 자서전적인 영화 ‘고백 (Confession)’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외부의 탄압도 막지 못한 정체성으로 빚어낸 걸작…어렵지만 아름다운 세계
이 영화는 이해하기 무척 난해하다. 영화는 공개 이후 파장을 일으킬 정도의 찬사를 받았지만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에게 작품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묻기도 전해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충격과 찬사 속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어떤 의미로든 ‘석류의 빛깔’을 접한 관객은 본 적 없던 세상과 만나게 된다. 아름답고 기이하며 그야말로 본 적 없던 것에 가깝다. 해석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감독의 의도에 대해 정론 없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됐다.
‘석류의 빛깔’은 일반적인 극영화와 다르게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스토리보다도 그 영상미 자체가 더 중요한 작품이다. 당장 어떤 미술관에 걸려도 손색이 없다. 배우 소피코 치아우렐리가 1인 다역을 맡았으며 연극적 조형미, 화려하지만 정적인 분위기,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감독의 철학과 미학이 스크린 속 마치 새로운 세계처럼 담겨있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은 영화의 소품, 배우의 행동, 안무의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직접 기획하며 ‘석류의 빛깔’이 가진 상징성을 강화하고 생명을 불어넣었다. 초현실적이고 강력한 비주얼은 경이롭게 표현되며 영화가 가진 ‘융합적 예술’의 면모를 진득하게 선보인다.
특히 영화 속 아르메니아 지역의 모습을 한 포도가 아르메니아 석판 위에서 발에 밟혀 으깨지는 장면은 어떤 의미로든 강렬하고 강력하고 처절하다.
외부의 어떤 탄압 속에서도 영화의 모든 요소에 생명의 상징성, 감독이 가진 정체성을 불어 넣어 빚어낸 ‘석류의 빛깔’은 소련 정부에 의해 ‘세상에 없던 영화’가 될 뻔했으나, 결국 ‘영화사에 남는 걸작’으로 기록됐다.
이해하기 어렵고, 너무 많은 것이 함축돼 마치 80분 동안 시를 읽는 것과도 같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이롭게 만드는 ‘석류의 빛깔’은 지금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강지호 기자 khj2@tvreport.co.kr / 사진= 영화 ‘석류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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