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하며 글로벌 혁신기업 육성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국내 산업 혁신 동력을 책임지는 중견·중소·스타트업·벤처기업은 한국 산업의 장기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중요한 요소다. 불확실성이 팽배한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국내 산업 혁신 지표를 형성하고 경제 역동성 엔진 역할을 하는 국내 기업들의 성장 과정과 리스크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 한스경제=김종효 기자 | ‘폰트 명가’ 산돌(Sandoll)이 콘텐츠 크리에이터 플랫폼 기업으로 변신을 선언했다. 산돌은 수십 년간 축적해 온 독보적인 폰트 지식재산권(IP)을 기반으로 클라우드 플랫폼은 물론 인공지능(AI)과 글로벌 영역으로 공격적인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산돌은 최근 기업설명회에서 폰트 사업 기반의 글로벌 종합 콘텐츠 크리에이터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중장기 목표를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폰트 IP를 핵심 사용자 경험(UX) 자산으로 활용하고 AI 기술과 클라우드 인프라 고도화를 통해 이미지 생성, 검색, 편집 기술까지 아우르겠다는 비전이다.
플랫폼 전환 전략은 글로벌 시장에서 가시적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폰트 플랫폼인 '베이키(Bakey)'는 아시아 시장 공략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베이키는 지난 11월 태국 '방콕 일러스트 페어 2025'에 참가해 현지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실제 행사 후 태국 이용자 수가 전월 대비 4배 늘어나는 성과를 거뒀다. 태국은 메신저 중심 커뮤니케이션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폰트 수요가 높은 시장이다. 산돌은 태국을 아시아 주요 글로벌 전략 거점으로 삼고 현지 파트너십 강화 및 로컬 감성을 반영한 폰트·템플릿 라인업 공동 개발을 추진 중이다.
윤디자인 인수도 공격적 경영으로 주목 받았다. 산돌은 지난해 업계 2위 경쟁사인 윤디자인그룹 인수를 완료해 국내 최다·최대 폰트 플랫폼을 구축하게 됐으며 국내에서는 경쟁 상대가 없는 독보적 위치를 확보하게 됐다. 산돌은 윤디자인의 콘텐츠 IP를 확보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산돌은 지난 1984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폰트 회사다. 지난해 별세한 창립자 석금호 사장은 컴퓨터 서체가 전무하던 시절 ‘한글 서체의 발전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비전 아래 사업을 시작했다. 1991년 산돌글자은행을 설립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종의 한글 서체를 개발하거나 복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한글 서체의 문화적 지속가능성에 크게 기여해왔다.
산돌은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히 인력과 연구개발(R&D)에 투자해 '폰트 파운드리(Font Foundry, 위탁생산)'로서의 독보적 진입 장벽을 구축했다. 폰트 1종 개발에 평균 3개월에서 1년이 소요되는 산업 특성상 산돌이 확보한 개발 역량과 방대한 라이브러리는 후발 주자가 단기간에 모방하기 어려운 핵심 자산이다.
산돌의 핵심 경쟁력은 독보적 IP 제작 능력이다. 현재 산돌은 20여명에 달하는 폰트 디자이너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업계 최고 수준이다. 디자이너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10년 이상에 달해 숙련된 전문성을 기반으로 IP를 지속 생산하고 있다.
수치적으로도 산돌의 IP 파운드리 능력은 압도적이다. 최근 4년 평균 폰트 개발 실적은 주요 경쟁사 대비 최소 2배가량 높으며 신규 폰트 제작 능력은 평균 2.9배가량 높다. 이런 제작 능력을 기반으로 산돌은 총 1100여종의 폰트 라이브러리를 확보하고 있다.
폰트 산업은 IP 비즈니스다. 우수한 IP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하락하지 않고 누적되는 장수명(Long Shelf Life) 자산이다. 1995년 출시된 '산돌고딕'이 현재까지도 산돌구름 내 폰트 활성화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산돌이 보유한 1100여종의 라이브러리는 과거 문화적 투자의 결과이자 현재 클라우드 플랫폼이 고정적 수익을 창출하는 핵심 원료가 된다. 과거의 한글 서체 책임 미션이 오늘날 K-콘텐츠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어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의 핵심 경쟁력으로 진화한 것이다.
산돌의 실질적 성장은 클라우드 스트리밍 방식의 폰트 플랫폼 '산돌구름'에서 비롯된다. 산돌은 국내 최초로 클라우드 기반 폰트 스트리밍 서비스를 론칭하며 시장 구조 자체를 혁신했다. 기존에는 폰트를 사용하기 위해 일일이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설치해야 했지만 산돌구름 이용자는 월 일정 요금을 내고 로그인만으로 어느 환경에서든 사용하던 폰트를 적용할 수 있게 됐다.
스트리밍 방식은 사용자에게 편리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록인(Lock-in) 효과를 동반한다. 사용자는 창작물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폰트 서비스를 유지하게 되고 이는 고객 이탈률을 극히 낮춘다. 실제 산돌의 구독 유지율은 93.6%에 달하며 유료 회원 수는 약 21만명에 육박한다. 기업 고객은 12%, 개인 고객은 200%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93%대 구독 유지율은 회사가 안정적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기반이 되는 동시에 향후 통합 콘텐츠 플랫폼으로 전환 시 AI나 스톡 등 신규 서비스를 론칭할 수 있는 '충성 고객 베이스'를 제공한다는 전략적 의미가 있다.
산돌구름의 기술적 강점은 클라우드 시스템의 안정성과 속도에서 나온다. 산돌은 암호화 기반 클라우드 폰트 플랫폼을 통해 높은 보안성을 제공하며 웹 환경에서 사용되는 웹폰트는 타사 대비 3배 빠른 로딩 속도를 자랑한다. 텍스트 기반 생성형 AI 서비스가 확산되며 웹 환경에서 폰트의 중요성이 급부상하는 현시점에서 3배 빠른 로딩 속도는 사용자 경험(UX)을 결정하는 핵심 경쟁력이자 기술적 발판이 된다.
산돌은 지난 2022년 업계 최초로 '낱개 폰트 구독 서비스'를 출시하며 고객층을 폭넓게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원하는 특정 단일 폰트만을 선택해 구독할 수 있어 사용 폰트 종류가 많지 않은 크리에이터나 라이트 유저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폰트 사용 기회를 제공한다. 폰트 사용 범위 통합 캠페인과 맞물려 저작권 인식이 개선되는 시기에 크리에이터 시장을 합법적으로 빠르게 흡수하는 '전략적 통로' 역할을 했다.
산돌의 콘텐츠 크리에이터 플랫폼으로의 전환은 M&A와 AI 기술 내재화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산돌은 자회사 산돌메타랩을 통해 디지털 스톡 콘텐츠 서비스 '비비트리'를 인수하며 IP 인프라를 IT 인프라 영역으로 확장했다. 비비트리는 AI 기반 스톡 이미지 제공, AI 텍스트 인식, AI 폰트 검색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폰트 외 이미지 등 콘텐츠 영역으로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자회사 간 시너지 효과는 전반적인 실적 개선을 이끌었으며 특히 비비트리는 AI 도입 이후 기업 고객 중심의 시장 확대를 통해 수익성이 크게 향상됐다. 또한 윤디자인과의 공동 상품 개발 협업 역시 매출 성장에 기여했다.
산돌은 미래 성장 동력으로 AI 기반 폰트 기술과 글로벌 시장 공략을 양대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지난해 자회사 산돌메타랩으로부터 이미지 생성형 AI 기술을 양수하며 기술 내재화를 본격화했다. 양수받은 기술에는 문자를 입력해 원하는 이미지를 찾고 생성하는 텍스트 투 이미지(text-to-image) AI 기술, 이미지를 고도화하는 이미지 투 이미지(image-to-image) AI 기술, 이미지 편집이 가능한 이미지 인페인팅(Image Inpainting) 기술 등이 포함된다.
기술 내재화는 산돌구름 플랫폼 역량을 통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폰트 외에도 이미지 검색 및 생성 서비스를 제공해 기존 서비스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는 전략이다. 산돌은 AI 기반 디자인 생성 서비스와 웹·모바일 환경에서의 폰트 활용 수요 급증에 대응해 폰트 IP를 핵심 UX 자산으로 활용한 AI 연계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인스웨이브와 AI-폰트 융합 UX 자동화 서비스를 공동 추진하는 등 기술 융합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높은 록인 효과로 증명된 폰트 플랫폼의 성공으로 확보한 안정적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비비트리 및 AI 기술 인수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기술 내재화 및 플랫폼 통합을 이룬 선순환 구조의 결과다. 산돌은 폰트 IP를 매개로 한 통합 콘텐츠 크리에이터 플랫폼으로 진화하며 2025년 3분기 영업이익 급증 동력을 만들어냈다. 또한 폰트 IP를 ‘단순 자산’에서 ‘AI 시대 디자인 UX 핵심 인프라’로 재정의하는 데 성공했다.
업계 전문가는 “산돌은 그들의 독점적인 폰트 파운드리와 선점한 클라우드 구독 모델이 결합되면서 폭발적인 수익성 개선을 달성했다”며 “이는 산돌이 AI 기술과 콘텐츠 플랫폼 영역에서 글로벌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자금력과 충성 고객 기반을 모두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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