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내년 ‘HBM4–AI 시대’ 주도권을 놓고 조직을 다시 짜며 반도체 왕좌 경쟁에 전면 돌입했다. 내년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등 이른바 ‘AI 빅3’가 잇따라 차세대 GPU·TPU를 내놓을 예정인 가운데 삼성은 메모리 개발 효율·연속성 극대화에, SK하이닉스는 HBM 수율·품질과 고객 밀착 체계 강화에 방점을 찍으며 서로 다른 처방으로 같은 목표를 겨냥하는 구도다.
◆ 삼성, 개발 효율·연속성에 ‘올인’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을 총괄하는 ‘메모리 개발 담당’을 신설하고 D램·낸드·솔루션·패키징 개발 인력을 한 축으로 모아 ‘개발 효율·연속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손질했다. 그간 개별 제품 라인 단위로 나뉘어 있던 개발 체계를 통합해 AI 서버·TPU·GPU용 HBM과 차세대 D램·낸드를 묶어 빠르게 기획·개발·검증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핵심은 HBM 조직의 재배치다. 지난해 별도 ‘HBM개발팀’으로 떼어 운영하던 조직을 이번에 D램개발실 산하 설계팀으로 편입하면서 HBM4·HBM4E 개발을 D램 미세 공정·설계 역량과 완전히 엮어버렸다. 업계에서는 HBM을 개별 프로젝트가 아니라 D램 로드맵의 중심에 놓고 공정·설계·패키징을 한 번에 조율하겠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은 이 구조를 앞세워 ‘기술 종합력’을 무기로 삼겠다는 계산이다. 이미 구글 차세대 TPU용 HBM4 공급 계약을 따내고 내년부터 엔비디아용 HBM4 품질 인증(QVL)까지 마무리하면 GPU·TPU 양축을 모두 잡는 구도도 노리고 있다. 구글 TPU의 HBM4 물량이 2028년까지 수배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만큼 통합 조직을 통한 개발·양산 속도와 원가 경쟁력이 승부수로 꼽힌다.
◆ SK하이닉스, 수율·품질·고객 밀착 강화
SK하이닉스는 정반대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 ‘풀 스택 AI 메모리 크리에이터’를 내세우며 2026년 조직개편에서 미국에 HBM 전담 기술 조직을 새로 두고 패키징 수율·품질만 전담하는 조직을 별도 구축해 HBM 특화 체계를 아예 독립된 축으로 키웠다. 개발–양산–품질 전 과정을 HBM 중심으로 쪼개고 붙인 구조로 사실상 “HBM 회사 하나를 그룹 안에 다시 세운 셈”이란 평가가 나온다.
특히 미주 지역 HBM 전담 조직은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등 주요 고객이 모두 미국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노린 ‘초근접 지원’ 카드다. 엔비디아에 HBM3E·HBM4를 앞서 공급하며 쌓은 신뢰를 유지·확대하기 위해 설계 변경·수율 이슈·패키징 최적화 등 고객 요구를 현지에서 즉시 처리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동시에 패키징 수율·품질 조직을 분리해 HBM 적층 공정과 테스트에서 ‘한 번도 멈추지 않는 양산 라인’을 만드는 데 조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신규 임원 37명을 한번에 발탁한 인사도 HBM·AI 메모리 축에 인력을 몰아주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SK하이닉스는 HBM3E 독주로 확보한 수익성을 유지하면서도 HBM4에서 삼성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수율·품질·고객 밀착’ 3박자를 조직 차원에서 고정시키려는 행보다.
◆ 구글 TPU·엔비디아…HBM4 큰손을 둘러싼 계산
관전 포인트는 구글 TPU와 엔비디아 GPU라는 두 축의 움직임이다. 구글은 7세대 TPU에 HBM3E를, 내년 8세대에는 HBM4를 탑재하는 로드맵을 갖고 있으며 이미 삼성과의 HBM4 공급 계약이 성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TPU 물량이 3년 만에 5배 이상 늘어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면서 삼성에겐 ‘초기 대량 물량’으로 기술력을 증명할 기회이자 SK하이닉스에겐 HBM4 고객 다변화 리스크로 작용한다.
엔비디아 쪽 판도는 여전히 SK하이닉스가 우세다. HBM3E 시장을 사실상 석권한 데 이어 HBM4도 재설계 논란을 진화하며 조기 양산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고 미국 HBM 전담 조직 신설도 ‘엔비디아 동맹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HBM3E 때의 품질·수율 논란을 HBM4에서 만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만큼 통합 개발 조직과 패키징·파운드리 시너지를 묶어 ‘한 번에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 조직개편으로 엿본 두 회사의 ‘승부수’
이번 조직 개편만 놓고 보면 삼성은 ‘메모리 전체 최적화’와 ‘기술 종합력’을, SK하이닉스는 ‘HBM 특화’와 ‘품질·고객 밀착’을 선택했다는 점이 가장 뚜렷하다. 삼성은 메모리·파운드리·AI 팩토리를 묶는 큰 판 안에서 HBM4를 승부처로 설정한 반면 SK하이닉스는 HBM을 아예 회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려 “HBM에서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결국 승패는 내년 하반기 이후 본격화될 HBM4 양산·검증·단가 협상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구글 TPU와 엔비디아 GPU라는 양대 수요처를 둘러싸고 누가 더 높은 수율과 안정적인 공급, 그리고 경쟁력 있는 가격·맞춤형 스펙을 동시에 제시하느냐가 ‘반도체 왕좌’를 결정짓는 최종 질문으로 남는다.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와 구글이라는 두 축을 누가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판도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한쪽은 기존 1위 고객을 지키는 싸움이고 다른 한쪽은 새로운 큰손을 만드는 싸움이라 양쪽 모두에게 ‘질 수 없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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