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컬럼] 포퓰리즘 시대의 대학―지식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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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 컬럼] 포퓰리즘 시대의 대학―지식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있다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5-12-08 20:06:19 신고

3줄요약

포퓰리즘의 파도가 지식의 전당을 덮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시사월간지 중앙공론은 202512월호 커버스토리에서 포퓰리즘 시대의 대학을 다뤘다. 지식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시대, 대학이 사회의 불안과 분노, 정치의 선동과 조작에 휘둘리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문제의식이었다. 놀랍게도 이 논의는 일본의 사정만이 아니다. 오늘의 한국 대학 역시 같은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지식은 불신받고, 전문성은 공격당하며, 대학은 더 이상 사회적 권위나 공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인기, 이벤트, 화려한 이미지, 그리고 대학 포퓰리즘이라 불러야 할 새로운 병이다.

 대학이 스스로를 낮추고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브랜드 상품처럼 꾸미는 동안, 학문은 조용히 퇴각하고 있다. 대학의 언어가 연구·교육·탐구에서 축제·노출·브랜딩으로 바뀌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문이 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SNS 바이럴(viral) 속도에 의해 재단되는 세상을 우리는 그냥 두어도 되는가.

 지금 한국 대학은 정치가 이미 겪었던 극장화의 길을 뒤늦게 따라가고 있다. 총장은 배우가 되고, 학생과 교수는 관객이 되고, 대학의 위기는 무대의 조명 아래 잠시 가려진다. 그러나 쇼가 끝나면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텅 빈 기초학문, 과로하는 연구자, 불안정한 청년 과학자, 그리고 지식의 권위를 잃어버린 사회일 뿐이다.

지식의 불신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대학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더 넓게 보면 한국 사회 전반에서 지식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과학보다 음모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전문적 검증보다 인기 있는 주장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며, 대학의 평가도 연구가 아니라 취업률’, ‘브랜드 영향력같은 시장주의적 기준으로만 재단된다.

이렇게 지식의 권위가 흔들릴수록 대학은 더 불안해진다. 불안한 대학은 대중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대중친화적 이미지 상품으로 재포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학의 본질은 무너진다. 연구의 깊이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포퓰리즘적 언어다.

오늘날 한국 대학이 직면한 상황은 중앙공론이 말한 것처럼 포퓰리즘 시대의 대학이라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지식의 구조는 느리고 깊으며, 대중의 환호는 빠르고 얄팍하다. 대학이 후자를 따라가기 시작하는 순간, 학문의 기초는 위태로워지고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우수 대학일수록 포퓰리즘에 취약한가

문제는 단지 중·하위권 대학의 생존 전략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KAIST와 같은 한국의 대표 연구중심 우수대학에서 포퓰리즘적 충동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한국 고등교육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첫째, 재정의 불안정이다. 국가 지원은 줄어들고, 등록금은 14년 넘게 동결됐으며, 대학은 사실상 기부금 유치에 생존을 걸어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 KAIST 같은 국책 연구중심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규모의 연구비, 더 비싼 연구장비, 더 많은 프로젝트를 운영해야 하기에, 재정 압박은 더 크다. 그럴수록 총장은 기부자와 정치권, 산업계 앞에 보여줄 만한 성과를 제시해야 한다. 그게 포퓰리즘의 문을 연다.

둘째, 학령인구 급감이다. 지방대는 생존의 위기이고, 수도권 명문대도 장기적 충원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대학들은 어느 순간부터 학문적 깊이보다대외 경쟁력 이미지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국제순위, 브랜딩, 언론 노출이 대학 성과를 대신한다. 셋째, 학생·학부모의 요구 변화다. 학생들은 교육의 질 향상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보이는 서비스도 강하게 원한다. 캠퍼스의 화려함, 해외프로그램, 기업형 인턴십 등 즉각적 체감 성과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한다. 대학은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비스 기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학 운영에 포퓰리즘적 요소가 침투했다.

넷째, 정치적 환경의 영향이다. 정치가 극장화되면, 대학도 그 그림자를 피할 수 없다. 정치권이 대학을 정책 도구처럼 다룰 때, 대학은 더욱 대중적 인기정치적 인정을 의식하게 된다. 그 결과, KAIST처럼 명성이 큰 대학일수록 더 많은 주목’, ‘더 큰 기부’, ‘더 큰 성과를 요구받는다. 성과는 점점 장기 연구보다 단기 이벤트와 시각적 성취로 미끄러지고, 대학의 정체성은 흔들린다.

대학 포퓰리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미래 세대다

대학 포퓰리즘의 문제는 단순히 대학 내부 행정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미래를 잠식하고 있는 구조적 위험을 목격하고 있다. 기초과학 투자가 단기성과에 밀린다. 비정규 연구자들이 소모품처럼 쓰인다. 대학원생 교육은 실험실의 인력수급 문제로 전락한다. 장기적 연구의 토대가 붕괴한다. ‘지식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실용성과 시장성이 지배한다.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대학에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학문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대학이 단기성과에 길들여지면, 느리지만 깊은 탐구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결국 한국 대학은 세계와 경쟁할 힘을 잃고, 미래 과학기술 생태계는 토대를 잃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포퓰리즘 시대의 대학이 어떻게 다시 학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근본적인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대학의 성과 언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부금, 국제순위, 언론 보도 건수, 캠퍼스 시설 확충이 대학의 성과처럼 포장되는 현실을 버려야 한다. 대학의 성과는 오직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 연구의 깊이, 교육의 혁신성, 지식 생태계에 대한 기여, 학문 공동체 내부의 지속 가능한 구조등을 꼽을 수 있다. 대학이 포퓰리즘에서 벗어나려면, 아예 성과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기부금 중심 구조를 투명하고 책임 있게 재설계해야 한다. 기부금은 대학의 생존에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보여주기 프로젝트에 돈이 흘러가는 구조는 파괴적이다. 기부금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 장기 연구 펀드, 기초학문 장학금, 연구윤리 강화 시스템, 안정적 교수·연구자 확보 등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이 기부금이 학문적 본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쓰이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총장의 리더십 구조를 바꿔야 한다. 총장을 ‘CEO형 경영자처럼 뽑는 방식은 포퓰리즘을 부추긴다. 총장은 대학의 배우가 아니라, 학문 공동체의 조정자이자 수호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총장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연구 생태계 개선, 교육환경의 구조적 혁신, 장기 비전 제시,

내부 민주적 거버넌스 강화 등이 강조된다. 이 네 가지 외의 것은 일 뿐이다.

교수·학생 공동체의 감시를 제도화해야 한다. 대학 포퓰리즘이 강해질수록 교수와 학생은 관객으로 전락한다. 이를 거부해야 한다. 총장 평가에 구성원 참여를 확대하고, 대학의 재정·기부금 운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학문적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공동위원회를 활성화해야 한다. 대학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영합적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언론과 지성계가 사회와의 매개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기업형 대학의 화려한 행사 사진을 그대로 받아쓰는 기사는 이제 대학을 더 병들게 할 뿐이다. 언론은 대학의 구조 문제, 연구환경, 기부금 운영, 학문적 질 저하를 감시해야 한다.

지성계 역시 대학의 위기를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고 싸워야 한다.

대학이 무너지면,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포퓰리즘은 정치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이 포퓰리즘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회는 지적 기반을 잃는다. 대학은 민주주의의 인프라이며, 과학기술의 출발점이고, 사회적 성찰의 공간이다. 여기가 무너지면 무엇이 남는가.

오늘날 한국 대학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생존을 위해 쇼의 무대로 변할 것인가, 아니면 구조적 압박 속에서도 학문의 본질을 지킬 것인가.

우리 사회의 대다수는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대학 내부의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정치, 언론, 학생, 시민사회 모두가 함께 대학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 대학은 시장의 상품이 아니다. 학문은 포퓰리즘의 장식물이 아니다. 지식은 인기투표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학에 이렇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진실을 탐구하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사회의 불안과 환호를 소비하는 쇼의 무대인가?”

오늘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내일의 한국은 더 깊은 어둠 속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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