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의 북토피아]한국적 서술 트릭의 정점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최병일의 북토피아]한국적 서술 트릭의 정점

뉴스컬처 2025-12-08 15:51:56 신고

3줄요약

[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엘릭시르 

한 남자가 사체를 호수에 유기한다. 남자는 교사, 유기당하는 사체는 그가 가르치던 학생이고 둘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호수가 다현의 몸을 삼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시작해 "그런데, 다현은 누가 죽였을까?"라는 문장으로 맺는 이야기의 프롤로그. 추리소설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클리셰 덩어리의 다른 장르소설과는 괘를 달리한다.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이 압권이다. 

이미 전작인 '유괴의 날', '내가 죽였다' 등을 통해 두터운 마니아 층을 보유한 작가 답게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며 인물과 인물 사이를 오간다. 누가 다현을 가장 미워했을까? 등장하는 인물마다 알리바이와 동기를 짜맞추며, 우리는 범인이 '누구'인지에 집중한다. 

정해연의 '홍학의 자리'를 펼치면, 마치 먼 이국의 습지에 발을 들인 여행자처럼 낯설고도 묘하게 끌리는 정서가 독자를 감싼다. 소설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서로의 체온을 가늠하며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지만, 그 묘사는 여행지의 풍경처럼 절제되어 있고, 감정은 홍학의 깃털빛처럼 여운이 길다.

작가는 인물의 마음을 직접 들춰내지 않는다. 대신 지면에 남은 발자국,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탁해 보이지만 안쪽으로 깊게 번지는 물빛 같은 사소한 디테일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완성하도록 초대한다.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감정은 단단히 눌러 담았지만, 문장 사이로 스며 나오는 체온이 독자의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한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제각기 길을 잃은 여행자다. 누군가는 떠나지 못해 머물고, 또 누군가는 머물지 못해 떠난다. 그들의 동선은 불규칙하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겹쳐지며 ‘자리’라는 존재의 가치를 묻는다. 홍학이 한 번 서 있던 자리의 물빛이 미묘하게 달라지듯, 사람 또한 누군가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정해연은 그 흔적을 소란스럽게 드러내지 않는다. 말 대신 시선으로, 설명 대신 침묵으로 인물들을 이끈다. 그 과정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듣는 현지인의 짧은 이야기처럼 담백하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을 오래 붙잡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이 소설이 상처를 치유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상처가 어떻게 빛을 받아들이는지, 그 변화의 결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마치 해질녘 늪지의 빛이 홍학의 몸을 타고 느리게 번지듯, 인물들의 감정 역시 적막한 문장 위에서 은근히 흔들린다. 그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는 능력은 작가 특유의 힘이며,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이다.

'홍학의 자리'는 여행기가 아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면 먼 곳을 다녀온 듯 깊은 정서적 여행의 감각이 남는다. 풍경처럼 잔잔하고, 여운은 바닷바람처럼 오래 지속된다.

정해연은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한때 누군가가 머물렀던 자리’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비록 상처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결국은 삶의 빛깔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지층임을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어느 낯선 호숫가에서 홍학이 천천히 날아오르는 장면이 마음 한켠에 깃든다. 그 잔상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여행할 가치가 있는 풍경이 된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