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고지대 적응에 한 번 실패했다면, 당시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이번엔 성공해야 한다.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에서 고지대 경기장을 배정 받은 한국이 반면교사 삼아야 할 케이스는 16년 전 자신이다.
지난 6일(한국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진행된 조추첨 결과 한국은 모든 조별리그 경기를 멕시코에서 치르게 됐다. A조 첫 경기는 12일 과달라하라에서 유럽 플레이오프 D패스 승자와 갖는다. 2차전은 19일 같은 경기장에서 개최국 멕시코를 상대한다. 3차전은 몬테레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만난다.
환경 면에서 큰 변수는 고지대라는 점이다. 한국이 초반 두 경기를 치르는 에스타디오 과달라하라 해발 1,571m에 위치해 있다. 그리 엄격한 기준은 아니지만 국제 산악의학회의 고고도 분류 중 1단계인 ‘고고도(high altitude)’가 해발 1,500m에서 3,500m를 의미한다. 즉 한국의 경기 장소는 일반적인 산악인 기준으로도 약간이지만 고고도로 분류되는 곳이다.
▲ 고지대 적응에 공들였는데도 실패했던 16년 전 기억
한국이 고지대에서 경기를 치른 대표적 대회가 2010 남아공 월드컵이다. 당시 2차전 장소 요하네스버그가 해발 1,753m로 고지대에 속했다. 그 적응을 위해 허정무 감독은 최선을 다했다. 5월 26일 오스트리아에서 전지훈련을 시작했는데, 해발 1,200m로 비교적 고지대인 노이슈티프트에서 훈련했다. 대회 첫 경기를 약 일주일 앞두고 남아공 루스텐버그의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루스텐버그도 해발 약 1,300m라 고지대 적응을 위한 선택이었다. 여기에 고지대 적응용 산소 조절 장비까지 썼다.
이처럼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고지대에서 실전을 치렀을 때 한국은 분명 적응에 실패한 모습이었다. 아르헨티나에 1-4로 패배했는데, 전력 면에서도 어차피 뒤떨어지는 상대라 고지대 문제가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지만 분명 패배 요인 중 하나였다. ‘산소탱크’ 박지성이 눈에 띌 정도로 70분 이후 지쳐 보였던 드문 A매치 중 하나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경기 막판까지 한국보다 체력과 집중력이 더 좋았다. 한국은 70분 동안 1-2로 싸우다가 막판에 2골을 얻어맞았고, 특히 초중반까지 어찌어찌 막던 리오넬 메시에게 막판에 농락 당했다.
▲ 적응 도중 저지대에 다녀오면 말짱 도루묵?
고산지대가 낮은 지대와 다른 환경을 띠는 건 대기압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기압은 고도가 1,000m 높아질 때마다 대략 0.1기압씩 낮아진다. 공기의 밀도가 낮아졌으므로 똑같은 킥을 했을 때 공이 받는 저항이 달라지고, 비거리와 궤적이 바뀌어 선수는 혼란을 겪는다. 더 중요한 건 호흡할 때 들이마시는 산소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체력이 쉽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1,500m 정도면 예민한 사람이 급격하게 등산했을 경우 고산병 증세를 느끼기도 하는 높이다.
그래도 수천 미터 높이에서 경기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1,571m 정도는 적응하면 극복할 수 있다. 고산지대 적응의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높이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저지대에 설던 사람이 고지대로 이주하면 낮은 산소량에 몸이 적응하면서 혈액 내 헤모글로빈이 증가하고, 피가 걸쭉해진다. 완벽한 혈액학적 적응에는 고도(km) 곱하기 11.4일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즉 과달라하라 높이인 약 1.5km에 적응하려면 17일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경기 장소와 비슷한 높이에서 17일 이상 훈련하면 고지대 적응은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공들여 훈련했는데도 남아공 월드컵 당시의 고지대 적응은 왜 효과가 없었을까. 정확한 분석은 나온 바 없지만, 당시 일정과 결과를 통해 유추해 보면 1차전을 위해 저지대로 내려갔던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1차전은 해발 0m인 포트엘리자베스에서 그리스를 상대해 2-0으로 승리했다. 이날 한국의 체력과 집중력은 최상이었다.
1차전 이틀 전 포트엘리자베스로 이동해 다음날 복귀했으니 만 3일 정도를 해발 0m에서 보낸 셈인데, 이 때문에 고지대 적응이 상당 부분 풀려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차이를 보면 분명해진다. 아르헨티나는 1, 2차전 모두 요하네스버그에서 치렀기 때문에 두 경기 체력에 차이가 없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회 직전까지 자국 저지대에서 훈련하다가 5월 29일부터 고지대 요하네스버그에 캠프를 차렸기 때문에 적응기간 자체는 한국보다 짧았다. 그럼에도 적응이 훨씬 잘 되어 있었다. 두 팀의 차이는 한국이 해안가를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 이번 일정은 남아공보다 훨씬 낫다
이번에는 한국이 16년 전 아르헨티나처럼 고지대 적응에 수월한 일정이다. 1차전과 2차전 장소가 같기 때문이다. 균일한 컨디션으로 두 경기를 치를 수 있다. 그리고 3차전은 해발 약 500m로 이동하는데,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전처럼 저지대로 이동한 직후 오히려 좋은 체력을 보이는 현상도 있기 때문에 이점을 기대할 만하다.
결국 멕시코에서 쓸 수 있는 베이스캠프 옵션 중 적당한 고지대를 잘 골라잡기만 하면 그 이상의 준비는 크게 필요치 않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다만 그렇다고 한국이 조 내 다른 팀보다 유리한 건 아니다. 애초에 멕시코와 남아공은 자국에 고지대가 많고, 국내파 비중이 높은 팀이다. 고지대 적응이 평생 되어 있는 선수 투성이다. 한국은 부랴부랴 고지대에 적응해 이들에 비해 불리한 점을 따라잡을 수 있을 뿐이다.
참고로 조별리그 도중 저지대와 고지대를 오가며 2010년 당시 한국 같은 난관에 봉착할 팀은 H조의 우루과이와 스페인이다. 이들은 1, 2차전을 미국 저지대에서 치르다가 3차전 마지막 대결만 과달라하라로 올라와 갖는다. 고지대 적응 전략에 따라 승패가 크게 갈릴 수 있다.
▲ 16강 진출 원한다면, 3차전 스케줄까지 고려하라
다만 고지대 관련 스케줄 편성에서 중요한 변수는 조별리그 이후다. 이번 대회는 48개국이 참가하기 때문에 조별리그를 통과해도 고작 32강 진출이다. 16강에 오르려면 토너먼트 한 경기를 더 잡아야 하고, 홍명보 감독의 목표인 8강에 가려면 두 경기를 더 잡아야 한다.
만약 한국이 A조 2위나 3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한다면, 32강전은 미국의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등 저지대에서 열린다. 그 뒤로는 고산지대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에 하나 A조 1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32강전과 16강전 역시 멕시코에서 계속 갖게 된다. 애초에 개최국 멕시코를 위해 마련해 둔 일정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32강 이후 경기 장소는 이번 대회 최고 고도인 해발 2,240m의 멕시코 시티로 바뀐다. 그리고 한국이 상대할 E, H, I, J, K조 중 한 곳의 3위팀은 모두 저지대에서 경기하다 온 팀이다. 그러므로 고지대 적응이 되어 있는 한국이 컨디션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즉 1, 2차전을 치렀을 때 조 1위를 노려도 될 정도로 승점 상황이 좋다면, 3차전 장소인 몬테레이는 짧게 치고 빠지는 일정이 좋다. 고지대 적응 상태를 유지한 채 32강전을 맞기 위해서다.
또한 여기까지 감안한다면 남아공 대회 당시처럼 1,300m 언저리에서 캠프를 차리는 게 아니라, 가능한 높은 고도에 캠프를 차리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조별리그만 생각해 과달라하라보다 약간 낮은 곳에서 적응훈련을 한다면 669m 더 높은 멕시코 시티에는 충분치 않다.
사진= 풋볼리스트, 게티이미지코리아, 국제축구연맹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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