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대한민국 잠재 성장률이 0%대로 내려앉고 5년 후 마이너스 성장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진단 아래, 한국 경제의 미래를 가를 '인공지능(AI) 대전환'에 대한 산업계와 통화 당국 수장의 격론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지난 5일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은행이 공동 개최한 세미나에서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SK그룹 회장 겸임·65)과 이창용(65)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 경제가 AI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던져야 할 ‘생존 투자’의 규모와 방식을 두고 첨예하게 논쟁했다.
최태원 "AI 산업은 거품이 아니다"
최태원 회장은 이날 시장 일각에서 제기되는 'AI 거품론(버블)'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AI 산업 전체를 놓고 보면 거품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의 주장은 AI 기술이 이미 단순한 기술 단계를 넘어 실질적인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반했다.
그는 이어 AI 시장이 붕괴하는 유일한 시나리오는 AGI(범용 인공지능)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을 때뿐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는 "저는 이미 AGI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며 산업계 최고 경영자로서의 확신을 피력했다.
다만 최태원 회장은 주식 시장의 측면에서는 거품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는 "주식 시장 차원에서 보면 항상 과도한 상승(오버슈팅)이 있기 때문에 그 측면의 거품은 있다"면서도 "반도체 산업도 그랬듯,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오버슈팅 문제는 해소될 것"이라며 붕괴 우려는 과도하다고 일축했다.
이창용 "실물 인공지능(피지컬 AI)에 주목해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중앙은행가로서 기술적 판단을 단정하기는 어렵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그는 AI 수요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거품이 일부 존재하더라도, AI가 서버를 넘어 로봇, 소형 기기 등 일상 제품에도 적용되는 '실물 인공지능(Physical AI)'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로 인해 반도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AI 경쟁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되든 'AI 붐'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나아가 첨단 반도체 칩뿐 아니라 기존 구형·범용 반도체(레거시 칩) 수요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았으며, 하드웨어 강국인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평가했다. 이창용 총재의 시각은 AI가 제조 및 하드웨어 산업 기반이 강한 한국의 실물 경제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와 내년 성장률을 잠재성장률 수준인 2%까지 높일 수 있다는 한국은행의 내부 분석과도 궤를 같이했다.
7년 안에 1400조 원: '성장 시한부 5년'에 던진 충격 요법
특히 최태원 회장은 곧 대한민국 잠재 성장률이 0%대에 머물다 5년 후쯤에는 마이너스로 하락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위기론을 제시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시간은 5년"이며, 이 짧은 기간 안에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경제를 견인하지 못하면 70년에 걸쳐 이룩했던 성장의 신화가 "다 소멸되는 상황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최태원 회장은 현재 한국의 AI 시장 속도가 중국보다 2배 느린 상황임을 지적하며, AI 패권 경쟁의 '3강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향후 7년 동안 20 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1 GW당 약 70조 원이 필요하다는 추산에 따라, 인프라 비용으로만 총 1400조 원의 규모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 GW X70조 원/GW = 1400조 원)
그는 이 막대한 인프라가 "해외 인재, 데이터, 빅테크를 끌어오는 자석"으로 작용해야 하며, 이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한국은 남이 만든 AI를 빌려 쓰는 '임차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 중국과 똑같은 수준에서 경쟁할 수 없"으므로, 메모리·AI 반도체, 통신·플랫폼, 제조·에너지 등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AI를 결합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400조 원의 재원 논쟁: 금산분리 완화의 딜레마
최태원 회장의 1400조 원 제안에 대해 이창용 총재는 재원 조달의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창용 총재는 "정부 재정만으로 이런 규모의 투자는 어렵다"고 인정하며, 그 대안으로 "민간이 주도하는 외부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과정에서 "최근 정부가 금산분리를 완화하는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언급하며, 대규모 투자를 위한 규제 환경 개선이 정부 당국 내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금산분리 규제는 일반 지주회사가 금융사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지해, SK그룹과 같은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 펀드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자산운용사(GP)를 계열사로 둘 수 없게 만드는 실질적인 장애물로 지적되어 왔다. 해외 경쟁사들이 금융기관과 손잡고 수십 조 원대 합작 펀드를 조성하는 것과 대비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재계의 우려가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이창용 총재가 "외부 자금 조달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제약을 풀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으나, 최태원 회장은 여기에 대해 일축에 가까운 입장을 보였다. 이창용 총재가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지분 보유 요건을 낮춰주면 제도적으로 좀 풀리느냐"고 질의하자, 최태원 회장은 "그건 기업이 알아서 해보라는 얘기가 아니냐"라며 "(데이터센터 투자는) 어느 한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이는 산업계가 요구하는 것이 공정거래법상 특정 조항의 미세 조정이 아니라, 국가적 목표 달성을 위해 대규모 투자금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전면적인 재원 운용의 자유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한국은행의 미래 금융 청사진: 안정성 우선의 디지털 화폐
AI 시대가 가져올 금융 시스템 변화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이창용 총재는 "프로그래밍이 불가능한 화폐가 쓰이는 시대는 곧 끝날 것"이라고 내다보며, 금융 산업 발전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스테이블 코인 도입의 필요성 자체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창용 총재는 안정성 관점에서 신중론을 견지했다. 그는 "자본 자유화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부족하다"며, 스테이블 코인이 법정화폐를 대체하거나 외환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스테이블 코인의 안정성과 유용성을 갖추되, 외환시장 규제를 위협하지 않도록 은행 중심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창용 총재는 한국은행이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실거래 테스트인 '프로젝트 한강'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논의되는 '예금 토큰'이 사실상 은행 중심의 스테이블 코인과 유사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또 한국은행은 통화 정책 분석의 첨단화를 위해 자국 언어 기반의 '주권 인공지능(Sovereign AI)'을 개발해 올해 하반기에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AI가 금융 혁신을 가속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통화 주권 및 자본 통제 기능을 확고하게 유지하려는 중앙은행의 전략적 대응으로 해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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