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도 중국어 쓰지?"
이 정도라면 대만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대만에선 중국어를 쓴다. 중국어로 푸퉁화(普通话), 영어로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리는 표준 중국어다. 청나라 시대 북경 지역 사투리가 그 기반이기 때문에 북경어(北京語)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쓰는 간체자 안 쓰고 옛날 한자를 쓰잖아?"
이 정도면 대만에 대해 꽤 아는 사람이다. 중국에서 한국(韩国)이라는 간체자를 쓰지만, 대만과 홍콩에선 한국(韓國)이라는 번체자를 쓴다. 한국에서 쓰는 한자(漢字)와 같다. 인터넷에서는 繁體中文 또는 Traditional Chinese라고 표기한다. 중국에서 간체자(簡體字)를 만들면서 번거롭다는 의미로 번체자(繁體字)자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서 제대로 쓴다는 뜻으로 정체자(正體字)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복잡하지만 한자를 배운 한국인에게는 익숙하다. 웬만한 표지판이나 간판은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대만 사람들이 중국어를 쓴다는 건, 한국 사람은 한국어를 쓴다는 것과는 그 의미가 많이 다르다. 학교나 사회 생활을 할 땐 중국말(Chinese)을 사용하지만, 꽤 많은 대만 사람은 가족이나 친지 사이에서 대만어(臺灣語, Taiwanese)를 사용한다. 객가어(客家語, Hakka)를 쓰는 사람들도 꽤 많다. 대만어와 객가어는 둘 다 중국어 사투리지만 표준 중국어와 통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투리인 광둥어(廣東語, Cantonese)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원주민(Native Taiwanese) 언어도 공식적으로 여러 종류가 남아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중국어, 대만어, 객가어로 안내 방송이 나온다. 관광객을 위해 영어, 일본어, 한국어도 나온다. 원주민 언어가 하나로 통일돼 있었다면 그 역시 안내 방송에 들어갔을지 모른다. 좁은 나라에 이게 무슨 일일까? 대만에서 이처럼 다양한 언어를 쓰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원래 대만섬에는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 계통의 원주민들이 살았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호주, 태평양까지 많은 섬들에 흩어져 사는 원주민들이 모두 먼 옛날 대만섬을 거쳐서 퍼져나간 오스트로네시안들이다. 부족끼리 서로 달랐지만, 대만 원주민들은 모두 오스트로네시아 어족(語族)에 속하는 언어를 썼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대만섬에 요새를 만든 17세기에서야 처음 외부인들을 만났다. 이후 외부인의 침략 혹은 진출이 이어져서 현재 대만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2% 정도다. 풍요로운 바닷가와 평지를 모두 외부인에게 빼앗기고 산에서 살아야 했기에 한때 고산족(高山族)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한 자릿수로 통계에 잡힐 정도이고, 대만 정부에서도 원주민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624년 네덜란드 세력이 기지를 세운 곳은 대만 남쪽 타이난(臺南)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와 일본, 중국을 잇는 중간기지로 이를 활용했다. 제주도에 표류했던 하멜도 대만 기지에 잠시 들러 일본을 향하다가 풍랑을 만났다. 그는 아마도 대만 땅과 한반도를 둘 다 밟아본 최초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네덜란드는 이후 북쪽 지룽(基隆)에 요새를 세운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섬을 지켰지만, 기지에 상주하는 네덜란드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들은 원주민을 부리는 것으로 모자라 중국에서 일꾼들을 데려왔다. 이렇게 대만이 중국과 인적, 물적으로 연결된 건 불과 400년 전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성공(鄭成功)이라는 풍운아가 일족을 거느리고 중국에서 건너와 네덜란드 세력을 쫓아냈다. 반청복명(反淸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을 외치며 해안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청나라에 저항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도망친 곳이 대만섬이었다. 1661년, 그는 대만에서 '정씨(鄭氏)왕국을 선포했지만, 청나라는 이내 바다를 건너 정씨왕국을 정벌했다. 정성공이 정씨왕국을 세운지 불과 21년 만이었다. 해군 전통이 없는 청나라가 앞세운 사령관이 시랑(施琅) 제독이었다. 시랑은 본래 정성공을 따르던 제독이었으나, 그와 반목하고 청나라에 귀순해 대만을 복속했다. 바다에 관심이 없던 강희제는 반청세력을 없애는 것에 만족했지만, 황제를 설득해 대만을 청나라에 편입시킨 것도 해양세력이었던 시랑이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이 1683년이었다.
정성공은 어떤 말을 썼을까? 아버지가 푸젠성(福建省) 출신 해상세력이었으니 당연히 푸젠성 사투리를 썼을 것이다. 현재 기준으로 민남어(閩南語)나 민동어(閩東語)가 푸젠성 사투리다. 푸젠성은 해양진출 전통이 약한 중국에서 몇 안 되는 해양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으로 초기에 진출한 중국인 화교들이 주로 이 푸젠이나 인근 광둥 출신이었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치며 상단을 이끌던 사람이었다. 좋게 보면 장보고와 같은 해상왕, 나쁘게 보면 해적집단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일본의 무역항이었던 히라도(平戸)에서 일본인 아내와 얻은 아들이 바로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이 푸젠성에서 자리잡으면서 일본인 어머니와 중국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정성공의 모(母)국어는 일본어였으리라.
여하튼 정씨왕국을 거쳐 청나라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처음 대만을 푸젠성 관할에 뒀다. 그런데 푸젠성이나 인접한 광둥성 동부에서 대만으로 건너가는 중국인들이 계속 늘어나자 이후 대만을 성(省)으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청나라 시대부터 1949년 국부천대(國府遷臺) 이전에 대만으로 건너온 중국인들의 후손을 본성인(本省人)이라 부른다. 그 수는 정씨왕국 건국 당시 인구 14만 명, 청나라 병합 당시 2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사투리인 민남어를 썼고, 그것이 변한 게 대만어다. 즉, 대만어는 중국어 사투리인 민남어의 사투리인 셈이다. 복잡하다. 게다가 다른 본성인들과 달린 객가인(客家人)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고집했다. 중국 안에서도 혹은 외국에 나가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객가어도 여전히 제법 쓰인다.
공식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때는 중국어를 쓰지만, 지금도 본성인들은 대만어나 객가어를 쓴다. 비율로 따지면 대만어 사용이 가능한 인구는 무려 86%, 객가어 사용 가능 인구도 13%에 달한다. 그중에도 약 30%는 제1언어로 대만어를 쓴다. 내 아내도 대만어에 능숙하다. 나이 많은 친척을 만나면 대만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시골에는 중국어를 못하는 어르신도 제법 있다고 한다. 장례식이나 행상 진행을 대만어로 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대만 감찰원장인 천쥐(陳菊)는 중국어가 서툴러 연설을 대만어로 한다. 대만 민주화 운동의 대모(大母)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대만에서는 다수가 대만어를, 소수가 객가어나 원주민 언어를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관직에 오르거나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일본어에 능통해야 했다.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배웠다. 친척 어르신들이 모여서 어릴 때 부르던 일본어 노래를 같이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이든 세대는 여전히 일본어를 잘하는 분들이 제법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제2외국어는 아직 일본어다.
대만에서 표준 중국어가 쓰인 건 불과 100년이 되지 않는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에게 대만을 반환했다. 이때부터 국민당 정부가 파견한 관리와 군대가 대만총독부와 일본군을 대신했고, 학교에서 표준 중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국민당 지배층은 대만 본성인을 일본에 협력한 배신자로 봤고, 치열한 국공내전(國共內戰) 중에 인력과 물자 수탈도 이어졌다. 불신과 갈등 속에서 본성인 수만 명이 희생되는 비극도 있었다. 1948년 벌어진 2.28 사건이다. 이어서 1949년엔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대거 대만으로 들어왔다. 이 국부천대(國府遷臺)로 국민당 정부와 함께 군인, 공무원, 민간인 등 십만여 명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들어왔다. 이들과 그 후손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부른다. 가족끼리도 표준 중국어를 쓰는 이들이었다. 외성인 비율은 현재 10%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중화민국 정부가 사용을 강제하면서 표준 중국어가 대만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는 가족과 친구끼리도 중국어를 쓴다. 원래 다양한 언어가 쓰이던 지역에 일본어, 중국어라는 지배 언어가 교체되면서 대만인 대다수는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쓰는 바이랭규얼(bilingual)이 됐다. 그 사이 대륙에선 문맹 퇴치를 위해 간체자(簡體字)를 도입하면서 글자 표기가 달라졌다. 두 글자는 컴퓨터 입력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공용어인 '중국어'. 중국어 사투리인 민남어의 사투리 대만어'. 고집스럽게 지켜온 객가어'. 여러 개의 원주민어'. 여전히 영향력이 큰 일본어'와 비영어권 국가로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어' 구사 능력까지. 고작 400년 역사의 작은 섬나라 언어가 이렇게 복잡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만 사람들이 중국어를 쓴다는 건 한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쓴다는 것과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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