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기술, 그리고 인간: 오락장치의 역사로 본 게임의 본질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운, 기술, 그리고 인간: 오락장치의 역사로 본 게임의 본질

프레시안 2025-12-06 14:58:10 신고

게임이 기계식 오락장치였던 시절

오늘날 '게임'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TV나 컴퓨터, 휴대전화와 같은 전자기기를 이용하는 놀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대적 게임의 기원을 조금 넓게 잡아보면, 전자식 비디오게임 이전의 기계식 오락장치(mechanical amusement machine)로까지 소급할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 서구의 도시 곳곳에는 동전을 투입하면 작동하는 다양한 오락장치들이 설치되었다. 이들을 모아놓은 전용 영업장이 '페니 아케이드(Penny Arcade)'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오늘날 '아케이드 플랫폼'이라는 용어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기의 오락장치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음악이나 영상을 감상하는 감상형 장치, 둘째는 버튼을 누르거나 손잡이를 돌리는 등 물리적 입력을 통해 작동하는 참여형 장치이다. 감상형 장치(예컨대 작은 구멍을 통해 영상을 관람하는 핍쇼머신)는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영상이 재생되므로 이용자가 수행하는 행위가 거의 수동적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반면 참여형 장치에서는 이용자가 적극적으로 버튼을 누르거나 손잡이를 돌려야 장치가 작동했기에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경험이 가능했다.

참여형 오락장치는 다시 운의 게임적인 것과 기술의 게임적인 것으로 나뉜다. 운의 게임(games of luck)이란 결과가 인간의 기술이나 노력보다는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유형으로, 단순한 뽑기 장치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기술의 게임(games of skill)은 인간의 숙련이나 조작 능력이 결과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유형이다. 손잡이를 빠르게 돌려 상대보다 먼저 말을 결승선에 도달시키는 경쟁형 장치가 그 예다. 둘의 게임성은 상반된 양상을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의 스펙트럼을 이루는 양 극단이라 할 수 있다. 즉 오락장치가 지닌 게임성은 이 두 요인의 길항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오락장치가 도박머신이 될 때

이 길항 관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점은 동전투입식 오락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다. 페니 아케이드에서 가장 인기가 컸던 오락장치는 핍쇼머신이었다. 1896년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projector) 발명으로 동영상 감상의 기능이 영화관으로 옮겨가자 동전투입식 오락산업 전반이 급격히 침체된다. 주요 수익원이 사라진 상황에서 등장한 구원투수는 바로 도박머신이었다. 이전에도 사행적 오락장치는 존재했으나, 슬롯머신은 운영자가 직접 보상을 전달할 필요가 없는 자동 보상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확실한 수익구조를 완성했다. 동전을 투입하면 내부 메커니즘에 따라 결과가 자동 결정되고, 승리 시에는 기계 아래의 지불컵으로 동전 보상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외팔이 도적(one-armed bandit)'이라 불리는 슬롯머신이 이 시기에 급속히 확산한 배경이다.

도박머신이 사회 문제로 부상하면서 1910년경부터 각종 규제가 시작되었다. 특히 1920년의 금주법 시행으로 주요 설치 장소였던 술집이 대거 폐쇄되자, 동전투입식 오락산업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도박머신 단속 강화는 역설적으로 기술의 게임이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핀볼(pinball)이다. 핀게임(pin game)의 원리를 응용한 핀볼은 쇠구슬을 쏘아올린 뒤, 핀이 박힌 게임판 위를 중력에 의해 굴러 떨어지는 과정을 통해 점수를 얻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쇠구슬의 발사 강도나 각도 조절, 경사 판단 등 플레이어의 조작이 결과에 영향을 주는 구조였기에, 기술 지향성이 분명했다.

1933년 금주법 해제 이후 핀볼머신은 폭발적 인기를 얻었는데, 미국 내 제조업체만 20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오늘날 핀볼의 핵심 구조인 범퍼(bumper)는 이 시기에 도입된 혁신이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자 자동 보상 시스템이 적용된 핀볼이 등장했고, 이는 다시 도박머신 논란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후반 미국 45개 주가 모든 자동 보상형 오락장치를 금지하면서 핀볼 또한 불법화의 길을 걷게 된다. 1947년 게임판 위에 굴러떨어지는 쇠공을 쳐 올릴 수 있는 플리퍼(flipper)의 발명으로 기술적 개입의 여지를 넓혔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핀볼은 여전히 불법 오락으로 취급되었다.

▲1972년 출시해 세상을 바꾼 아타리의 <퐁>(Pong).

전자식 시대: '기술의 게임성'의 재구축

결국 기계식 시대는 운의 게임과 기술의 게임 사이를 진동하던 오락장치가 도박머신으로의 회귀하는 결말을 맞았다. 이 폐허에서 전자식 비디오게임이 등장했다. 1972년 <퐁>(Pong)의 성공으로 전자식 비디오게임의 시대가 개막했으나, 기계식 시대의 어두운 유산이 남아있던 상태에서 이 출발은 결코 호의적인 환경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명백히 동전투입식 오락장치였던 <퐁>은 어떻게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대중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퐁>을 비롯한 초기 비디오게임이 고유한 방식으로 '기술의 게임성'을 재구축한 데 있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아타리(Atari)의 창립자 놀런 부쉬넬(Nolan Bushnell)이다. 부쉬넬은 <퐁>이 핀볼류 기계식 오락장치의 연장선으로 인식되는 것을 경계하며, 전략적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는 게임기를 어두운 술집이나 뒷골목이 아닌 대학가나 볼링장 등 사회적으로 '건전한' 공간에 배치했고, 전자회로와 스크린을 강조하여 첨단 비디오 전자기기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별점은 '점수(score)' 시스템이었다. 점수의 도입은 플레이어의 기술을 수량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숙련의 추구를 가능하게 했다. 점수가 플레이어의 기량을 차별화하자, 이용자들은 더 높은 점수를 향해 반복적으로 도전하는 계기가 됐다. "easy to learn, difficult to master(배우기는 쉽지만 마스터하기는 어렵게)"라는 부쉬넬의 디자인 철학은 바로 이 구조에서 실현되었다.

한편 비디오게임의 '비디오' 속성(시각성)은 기술의 게임성을 한층 강화했다. <퐁>의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패들과 공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입력에 반응하는 기호적 객체였다. 이용자는 이들의 관계를 해석하고 조작해야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 즉 비디오게임 플레이는 '시각 기호를 해독하고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요구했다. 이후 갈수록 정교해지는 게임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도 시각성에 기반하는 비디오게임 고유의 기술의 게임성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두 개의 게임성과 '인간다움'

전자식 시대는 기술의 게임성을 개척함으로써 기계식 시대의 도박적 유산을 극복했지만, 그렇다고 '운의 게임성'이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운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게임은 단순한 기술 훈련 시뮬레이션에 그칠 뿐이며, 반대로 기술성이 없는 게임은 의미 있는 도전을 제공하지 못한다. 좋은 게임이란 결국 이 두 게임성이 적절히 긴장과 균형을 이룰 때 완성되는 것일 터다.

이 길항 관계는 단지 게임 디자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AI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인간성과 주체성의 의미가 재구성되는 상황에서, 오락장치의 역사 속 두 게임성의 긴장은 인간–기계 관계의 철학적 함의로 확장된다. 운의 게임에서 결과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기계적 우연'에 의해 결정될 때 인간의 개입은 점차 최소화된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운'을 신탁이나 초월적 존재에 위임했지만, 이제 그 자리를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만약 게임의 결과가 인간이 아닌 알고리즘의 판단과 확률적 조작에 의해 결정된다면, 가장 인간적인 행위로 여겨지던 '놀이'조차 인간의 손을 벗어나게 되는 셈이다.

오늘날 확률형 아이템, 가챠, 자동사냥 시스템의 확산은 그러한 변화의 징후로 읽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게임이 다시금 도박머신으로 회귀하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특권적 위치를 침식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놀이의 의미를 재고해야 함을 시사한다. 결국 인간이 '놀이하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인간적 개입과 해석의 공간을 회복하는 게임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게임에서 인간의 개입과 참여를 상징하는 플레이마저 자동사냥, 가챠 등의 이름으로 인간의 손을 떠나고 있다. ⓒ넷마블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