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로 떠난 패션 시장
패션의 나침반이 남쪽으로 기울었다.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황금 시장으로 떠오른 이유.
한섬의 시스템 파리 2025F/W 컬렉션
패션업계가 동남아시아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전 세계 패션 산업이 장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성장 거점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 지금 글로벌 패션 기업들은 포스트 차이나이자 새로운 마켓 허브로 동남아에 주목한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주요국은 최근 5년간 연평균 GDP 성장률이 5% 내외를 기록하며 안정적 내수 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특히 젊은 소비층 비중이 높고 SNS 이용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디지털 패션 소비가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더불어 중국 내 인건비가 상승하고 미중 무역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글로벌 의류 기업들은 제조 기지 역시 동남아시아로 빠르게 옮기고 있다.
여기에 단순한 생산 기지 이전에서 나아가 현지 내수 시장 공략까지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이 트렌드로 진화한 상황. K-콘텐츠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한류 콘텐츠의 인기를 바탕으로 K-패션 브랜드의 호감도가 급상승했으며, K-팝 아이돌이 착용한 의상이나 협업 아이템은 동남아 MZ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까지 해 한국 브랜드의 프리미엄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편승해 국내 브랜드는 성장세가 둔화한 내수 시장에서 눈을 돌려 젊은 인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동남아 시장으로 발 빠르게 진출하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에잇세컨즈 필리핀 매장
패션 브랜드 최초로 APEC 정상회의 공식 협찬사로 선정되며 인기를 확인한 마뗑킴은 10월 말 태국의 유통 대기업 센트럴 그룹과 유통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5년간 지속되는 계약으로, 매출 목표는 약 600억원. 2024년 연매출 1500억원 돌파에 이어 급속도로 성장한 매출 수치를 반영해 잡은 목표다. 마뗑킴은 11월 방콕의 대형 백화점 센트럴 칫롬에 첫 공식 매장을 열고, 센트럴 그룹의 유통망을 기반으로 20개오프라인 단독 매장과 공식 온라인 채널 공략에 나섰다. 지난 2024년 10월 홍콩을 시작으로 아시아 주요 국가에 진출하고 불가리아, 체코 등 동유럽 시장으로 뻗어나간 뒤 불과 1년 만에 확장 무대로 동남아시아를 선택한 것이다.
대기업의 진출도 눈여겨볼 만하다. 현대백화점그룹 계열 한섬은 지난 9월 태국 방콕의 ‘엠초이스& 민트 어워드 2025’에서 시스템, 시스템옴므 패션쇼를 선보였다. 동남아시아에서 진행한 최초의패션쇼로, 태국을 동남아시아 진출의 교두보 삼아 현지 네트워크구축, 팝업 스토어 개최 등 맞춤형 상품 개발을 병행할 계획이라고. 패션쇼는 6월 파리 패션위크에 참석한 태국 관계자의 요청으로 성사됐으며, 한국 브랜드에 대한 동남아 시장의 수요를 보여주는 사례다.
LF 헤지스 호찌민 다이아몬드 백화점 매장.
LF의 헤지스는 2017년 베트남 진출 이후 꾸준히 시장의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판매 전략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베트남에 총 9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며, 상승세를 보이는 골프 라인 판매를 강화했다. 같은 그룹의 남성복 브랜드 마에스트로도 호찌민에서 하노이로 무대를 옮겨 내년 3호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품질과 현지 수요를 반영한 디자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인플루언서 협업 등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친 결과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에잇세컨즈는 지난 7월 필리핀 마닐라의 대형 쇼핑몰 ‘SM 몰 오브 아시아’에 첫 글로벌 매장을 오픈했다. 2016년 중국 시장에 진출했으나 사드 보복 여파로 2년 만에 철수한 후 아시아 시장에 대한 재도전으로 필리핀을 고른 셈이다.
안다르의 동남아시아 매장.
애슬레저 브랜드 안다르는 싱가포르로 발걸음을 옮겨 대표 명소인 복합쇼핑몰 비보시티에 약 178㎡(54평) 규모의 3호점 론칭을 알렸다. 개점 첫날부터 오픈런과 기나긴 대기 행렬이 이어졌고, 주력 상품은 이틀 만에 일부 품절을 기록했다. 센토사섬으로 이어지는 여행 관문인 비보시티의 입지 분석과 열대 기후라는 점을 감안해 자체 개발 원단으로 만든 제품을 주 라인으로 생성한 이점이 고루 발휘됐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역시 9월 싱가포르에 회사를 설립한 이래 첫 글로벌 팝업 스토어를 선보였다.
도시의 3대 쇼핑몰로 꼽히는 오차드 로드의 파라곤 쇼핑몰중앙광장을 활용해 약 330㎡(100평) 규모의 대형 팝업 스토어를 운영했으며 스튜디오 톰보이, 로우로우, 자주, 비디비치 등 자사 패션 및 뷰티, 라이프 부문의 6개 브랜드가 참여했다. 원활한 마케팅을 위해 싱가포르 유명 백화점 체인 메트로와 손잡고 판매와 팝업 공간을 함께 마련하기도 했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도 일찌감치 동남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디올은 태국에 100만 개의 황금색모자이크 타일로 장식한 골드 하우스를 열었고, 루이 비통 역시 복합문화공간 더 플레이스를 방콕에 마련했다. 태국 현지와 인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소비자는 물론 관광 목적으로 태국을 찾는 방문객들을 잡는 일석이조 전략을 고수하는 것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싱가포르 팝업 스토어
동남아시아가 황금 시장으로 떠오른 이유는 막대한 인구, 그로 인한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는 전 세계 인구의 12분의 1,약 7억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35세 이하 젊은세대다.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통계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생산가능인구(20~59세)는 2022년 기준 약 3억7370만 명으로 거대한 소비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23년 동남아 지역의 노동참가율이 약 66%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젊고 활발한 경제활동 인구층이 두텁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 이들은 패션 소비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온라인 플랫폼과 SNS를 통해 트렌드를 빠르게 흡수하고 재생산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기도 하다. 특히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주요국은 모바일 결제 이용률이 70% 이상으로, 쇼피(Shopee), 라자다(Lazada), 틱톡숍(TikTok Shop) 등이 패션 유통의 핵심 채널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플랫폼에서는 라이브 커머스, 셀럽 협업 컬렉션, 숏폼 스타일링 영상 등이 실시간으로 매출을 견인하며 새로운 소비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 국부펀드 회사 테마섹(Temasek)과 구글의 공동보고서에 따르면 아세안 디지털 경제 규모는 2025년까지 약 300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온라인 소비의 확산과 함께 패션 시장의 성장 잠재력 역시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 럭셔리 시장의 성장세도 두드러진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회사인 나이트 프랭크 LLP의아시아·태평양 연구 책임자인 크리스틴 리는 동남아시아의 부의 지형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통계에 따르면 2027년이면 순자산 100만 달러 이상을 가진 이가 약 1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2022년보다 50만 명 넘게 늘어난 규모다. 소득 수준 상승과 더불어 중저가 소비 확대, 여성 전문직 종사자 증가가 맞물려 소비 구조의 고도화를 촉진하고 있다. 젊고 디지털 친화적인 인구 구조, 급성장하는 온라인 소비력 이 결합된 신흥 패션 소비 중심지. 패션업계의 다음 타깃으로 떠오른 동남아시아의 성장에 주목할 이유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