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업계 진찰은 끝났다.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던 산업 사이클이 더 이상 돌지 않는다는 진단이 내려진 지 오래다. 이에 정부는 석화기업에 처방전을 내렸다. NCC 설비 감축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잃은 범용 제품 생산 축소를 강하게 권고했다. 체질 개선에 앞서 체중을 먼저 줄이라는 것. 생존을 위한 극약처방이다. 사업재편안 제출 기한은 연말까지다. 제출 한 달여를 앞둔 지금, 각 석유화학사는 극적인 다이어트를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주>편집자주>
【투데이신문 심희수 기자】 내년 대규모 복합 석유화학 시설 준공을 앞둔 에쓰오일이 울산 산단 재편 논의 테이블에서 눈총을 받는 모양새다. ‘샤힌 프로젝트’ 완공을 앞두고 논의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정부가 연말로 정한 사업재편안 제출 기한을 넘기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울산 산단은 그야말로 시계제로다.
5일 대한유화·SK지오센트릭·에쓰오일에 따르면 현재 3사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사업 재편 컨설팅을 맡기고 NCC 감축 방안을 논의 중이다. 울산 석화단지는 지난 6월 기준으로 연간 총 174만톤(t)의 에틸렌 생산 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유화가 90만t으로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SK지오센트릭과 에쓰오일이 각각 66만t, 18만t을 가졌다.
3사가 논의를 시작했지만 진척은 더딘 상황이다. 대산 산단이 1호 재편안을 도출하고, 여수 산단이 여천NCC의 3공장 중단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업계에선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를 협상 걸림돌로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울산 석화기업의 재편 논의 과정에서 에쓰오일은 ‘동상이몽’을 보이고 있다”며 “고효율 설비를 내세운 ‘샤힌 프로젝트’로 경쟁력 강화를 이미 완료했다는 게 에쓰오일의 입장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샤힌 프로젝트’는 에쓰오일이 9조2580억원을 투입해 울산에 조성하는 대규모 석유화학 복합 시설 건설 사업이다. 원유를 정제 과정 없이 직접 석유화학 제품으로 전환하는 TC2C(Crude Oil to Chemicals) 기술이 적용돼 기존 설비보다 효율이 3~4배 높고, 원가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고 평가받는다. 내년 상반기 중 준공해 하반기 시운전에 들어갈 예정이다.
문제는 공장 생산량이다. 시운전을 거쳐 본격 가동되면 에틸렌(180만t), 프로필렌(77만t), 부타디엔(20만t), 벤젠(28만t) 등이 생산될 예정이다. 정부가 제시한 에틸렌 감축량(270만t~370만t)의 절반가량이 에쓰오일에서 다시 생산되는 것이다. 정부를 비롯해 각 석유화학사들의 감축 노력이 무색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이번 사업재편안의 방향은 원가경쟁력 강화보다 생산 설비 감축을 통한 공급 과잉 경감이 목적이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우수한 효율을 가진 설비로 무장한 중국과 중동, 인도도 범용 제품 설비 증설을 진행하고 있다”며 “범용 제품 생산 설비 감축은 국내 석화업계가 생존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보자고 하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산업통상부 김정관 장관도 지난 8월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책임 있는 자구 노력 없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려 하거나 다른 기업들 설비 감축의 혜택만을 누리려는 무임승차 기업에게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재편안 제출 기한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울산 산단 관계자는 “연말을 기한으로 재편안을 논의 중이지만, 진전이 잘 안 되고 있다”며 “불과 3주 정도 남은 기간 동안 합의안 타결 여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SK지오센트릭은 에탄 도입을 통한 원료 구조 다변화를, 대한유화는 에쓰오일과의 납사 거래 비중을 줄여 수입처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SK지오센트릭은 지난달 SK에너지와 에탄 사업 추진을 위한 전략적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에탄은 기존 나프타보다 가격 안정성과 에틸렌 생산 효율이 높은 원료다. 양사는 에탄의 수입부터 소비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통합 공급망 체계를 마련해 가격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계획이다. 다만, 에탄 도입이 이번 재편안과는 별도의 자구책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SK지오센트릭 관계자는 “에탄 도입은 사업 재편안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화학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에쓰오일로부터 나프타를 공급받던 대한유화는 해외 공급처를 다변화할 계획이다. 에쓰오일의 석화사업 진출이 내년부터 본격화하며 나프타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서다. 대한유화는 올해 에쓰오일과 1144만배럴(134만t)의 나프타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대한유화가 구매하는 물량의 70~80%에 해당한다. 대한유화 관계자는 “에쓰오일 나프타를 점차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끝>끝>
Copyright ⓒ 투데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