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서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의 조명이 붉게 깔리는 순간 공간의 표면이 변화한다. 그 색채는 파리의 밤을 연상시키지만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재창조된 감각적 세계다. 관객은 극장의 외피를 유지한 채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무대 양옆을 지키는 풍차와 코끼리는 장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과잉의 미학, 즉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드러내려는 연출의 방향성을 가장 먼저 선언하는 장치다. 이 요소들이 결합하며 재연 첫 장면부터 기대 이상의 밀도를 형성한다.
올해 돌아온 뮤지컬 ‘물랑루즈!’는 초연이 남긴 인상을 다시 소환하면서도 현재의 무대 기술과 감각을 정교하게 흡수했다. 토니 어워즈 10관왕이라는 이력은 사실상 공연의 규모와 복합성을 설명하는 문장일 뿐이며, 실제 무대에서 느껴지는 힘은 기록 이상의 자생적 에너지를 갖는다.
프리 쇼는 공연의 독특한 리듬을 상징한다. 공식적으로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인데, 배우들은 이미 인물의 몸과 호흡으로 객석을 채운다. 이로 인해 공연의 ‘시작’은 특정 시점이 아니라 흐름의 지속인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쇼의 목격자가 아닌, 쇼가 존재하는 공간의 구성원처럼 놓인다.
무대는 불필요한 장식 없이 장면의 정서를 증폭시키는 구조로 움직인다. 붉은 조명과 깊은 그림자, 높고 낮은 레이어를 구성하는 세트는 파리 클럽의 공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인물의 감정선을 외부로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재연을 맞아 조명의 결, 무대의 명암 대비는 더욱 미세하게 조율된 인상을 준다.
크리스티안을 연기하는 홍광호는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 감정의 기울기를 정교하게 조절한다. 그의 해석은 첫 노래부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으며, 인물의 사랑과 고뇌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걸었던 ‘세계관의 발화’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석훈의 크리스티안은 공연 전체의 감정을 부드럽게 이끄는 흐름을 만든다. 그의 음색은 허투루 흐르지 않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감정적 긴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절제된 표현으로 인물의 순수함을 설득력 있게 완성했다.
차윤해는 젊은 보헤미안 시인의 에너지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쌓아 올린다. 그의 크리스티안은 서사에 활력을 부여하며, 공연의 여러 층위 중 ‘젊음과 이상’의 결을 한층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해낸다. 세 배우의 다른 해석은 재연의 매 공연이 새로운 경험으로 느껴지게 하는 핵심이다.
김지우와 정선아가 연기한 사틴은 그 자체로 극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축처럼 존재한다. 두 배우 모두 화려함과 취약함, 욕망과 체념이 교차하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을 무대에서 정확히 구현한다. 이들은 캐릭터의 외면적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균열에 집중해 사틴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어낸다.
앙상블의 움직임은 공연의 시각적·청각적 밀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고난도의 안무를 정교하게 수행하는 배우들의 호흡은 공연의 에너지를 빈틈없이 채우며, 리듬의 폭발력이 극의 감정선과 맞물려 인상적인 장면을 잇달아 만들어낸다.
음악은 ‘물랑루즈!’의 심장이다. 아델부터 리한나, 비욘세, 레이디 가가까지 시대를 이끈 목소리들의 음악이 오케스트라 편곡을 통해 재구성되면서 장면마다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70여 곡으로 이뤄진 매시업의 흐름은 공연의 정서를 쌓아 올리는 구조적 힘을 지닌다.
극이 펼쳐놓는 메시지는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있다. 진실, 아름다움, 자유, 사랑 이 네 단어는 극이 구축하는 모든 이미지와 음악, 인물의 선택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해석된다. 보헤미안들이 지향했던 가치는 특정 시대의 이상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품고 있는 질문과 충돌한다.
이 메시지는 과거의 낭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전환하는 힘을 지닌다. 진실은 현실의 거울로, 아름다움은 존재의 이유로, 자유는 선택의 확장으로, 사랑은 흔들리는 삶을 붙드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네 단어는 공연의 장면마다 다른 결로 드러나며,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매번 다른 울림으로 퍼져 나간다.
재연의 완성도는 기술적 정교함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조명, 음향, 세트, 의상, 안무, 사운드 디자인까지 모든 요소가 긴밀하게 맞물려 하나의 유기적 세계를 만든다. 이 정교함은 장면의 연결뿐 아니라 배우들의 감정선에도 깊이를 더하며 공연의 호흡을 단단히 묶는다.
‘물랑루즈!’는 올해 가장 강렬한 무대적 체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화려함의 표면을 넘어 장면이 묻어내는 감정의 깊이와 서사의 결이 관객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깨운다. 붉은 불빛 아래에서 무대는 삶의 한 장면처럼 진동하며, 재연은 그 진동을 더욱 분명하게 들려주는 순간이 된다.
공연은 2026년 2월 22일까지 계속된다. 붉은 불빛이 다시 켜지는 순간, 파리의 밤은 서울의 공연장 안에서 또 한 번 새롭게 태어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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