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강조하는 '혁신'은 그럴듯한 말로 치장돼 있지만 정작 내용은 비어 있다. 비대면 진료 플랫폼의 의약품 도매업 진출을 금지하는 약사법 개정안, 이른바 '닥터나우 방지법'이 상임위를 통과한 지금의 풍경이 그렇다. 제도 안에서 조정할 방법을 찾기보다는 가장 손쉬운 해법인 '금지'부터 꺼내 들었다.
대한약사회와 정부가 내세운 근거는 '리베이트 가능성'과 '플랫폼 종속 우려'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새로운 형태의 불공정 유발 가능성, 의료 전달체계 왜곡 우려는 모두 가정일 뿐이며 실제 사례가 확인된 적은 없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기존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낡은 구조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와 규칙, 관행이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번 규제가 혁신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기득권 보호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정치권이 타다 금지법을 두고 "정치의 이해조정 실패"라며 자성했던 말이 떠오르는 이유다. 정부는 한 번 했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닥터나우는 기존 서비스 구조에서 지적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개선책을 내놨다. 지도 기반 노출로 특정 약국 우대를 차단했고 약국이 재고를 직접 등록할 수 있는 절차도 열었다. 국정감사에서도 이런 조정 노력을 설명했지만 정책 논의 과정에서 이 변화는 사실상 반영되지 않았다.
혁신의 어원은 '묵은 것을 벗겨 새것으로 바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장통 없는 혁신은 없다. 당연히 누군가는 변화에 적대적이며 생존권 위협을 호소하기 마련이다.
다만 혁신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끌어와 새 시장을 억지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던 기존 시장에도 '약국 뺑뺑이' 같은 구조적 결함이 존재했고 이를 해결하려 등장한 것이 스타트업이다.
좀 더 솔직해져 보자. 병원 인근 약국은 입지 자체가 매출이고 그 입지 가치는 권리금으로 환산된다. 병원이 많을수록 권리금은 뛰고 그만큼 안정적 환자 유입을 기대하는 구조가 고착된다.
비대면 진료는 이 구조를 흔든다. 환자는 더 이상 병원 옆 약국을 찾을 필요가 없고 위치 독점의 힘은 약해진다. 닥터나우가 이 틀을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권리금 중심 구조에는 균열을 냈다. 기존 약국 입장에서 이런 변화를 달가워할 리 없다.
반대로 젊은 약사나 지방 약국처럼 입지에서 불리했던 곳에는 플랫폼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필요한 약만 제대로 갖춰도 위치와 상관없이 선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득권 논리만 반영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플랫폼은 전통 의료 시스템이 가진 여러 한계를 혁신으로 보완했다. 시간과 거리 제약을 완화하고 소비자의 접근성을 높였으며 약 선택권도 넓혔다. 하지만 국내 제도의 작동 방식은 '혁신이 질서를 흔든다 → 질서가 불안해한다 → 스타트업의 개선안보다 불안 해소가 우선된다 → 규제가 혁신보다 앞선다'는 패턴을 반복한다.
정작 묻지 않는 질문은 따로 있다. "이 변화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 혁신이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는가", "전통 산업의 불안을 제도적 조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규제는 이 질문들이 논의되기 훨씬 앞 단계에서 멈춰선다.
혁신을 무조건 밀어붙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사회적 충돌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해법이 '금지'여서는 안 된다. 리베이트 우려가 있다면 감시 체계를 강화하면 되고 종속이 걱정된다면 플랫폼의 데이터 운영 구조를 법으로 명확히 규정하면 된다. 혁신은 조정하고 관리할 대상이지 사후 규제로 봉인할 대상이 아니다.
타다 금지법은 이미 사후적 불법화의 폐해를 보여준 바 있다. 정부는 당시 이를 "정치의 이해조정 실패"라며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의 선택은 그 반성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혁신은 어느 분야든 어떤 방식으로든 등장하게 돼 있다. 문제는 혁신 자체가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며 사회가 '탈피'하는 과정을 얼마나 성숙하게 만들어내느냐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스타트업을 장려하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기득권의 우려를 넘어서고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정책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Copyright ⓒ 여성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