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니’는,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한계선을 다시 세우는 일에 대하여
‘아니’라는 말을 할 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아마 심장이 쿵, 하고 아랫배까지 내려앉는 기분일 겁니다. 목구멍이 뜨끔거리며 조여오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상대방이 나를 끔찍하게 미워할 것이라는, 혹은 이 관계가 끝장날 것이라는 원초적인 공포가 밀려오겠죠.
- - ‘이기적인 사람.’
- - ‘까다로운 사람.’
- - ‘착하지 않은 사람.’
그것은 그와의 관계에서 당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낙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아니’라는 말 대신, 수천 가지의 다른 말들을 배웠습니다. “음, 그게 좋을 것 같긴 한데…”라며 모호하게 웃는 법. “내가 지금은 좀 바빠서, 나중에 생각해볼게”라며 대답을 회피하는 법.
그리고 가장 비극적이게도, 당신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그 순간에도 “응, 괜찮아”라고 말하며, 당신 자신을 배신하는 법을 말입니다.
당신에게 ‘한계선(Boundary)’ 혹은 ‘경계선’은, 지켜야 할 당신의 영토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신의 이기심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금기어’였습니다.
당신의 한계선을 주장하는 것은, 그에게는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았으니까요.
이제 당신은 그 전쟁터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그 전쟁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아니’를 두려워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지독한 습관의 기원을 추적하고, 당신이라는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그 선명한 ‘아니’의 감각을 되찾아와야 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관계를 위한 첫걸음 이전에, 당신이 당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독립 선언’ 입니다.
당신의 국경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애초에 당신은 한계선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삶과 당신의 영토를 가진, 당당한 주권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묘한 전략가였고, 당신의 영토를 야금야금, 아주 치밀하게 잠식해 들어왔습니다.
그의 침략은 노골적인 점령의 형태를 띠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달콤한 논리로 당신의 국경을 무너뜨렸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당신의 한계선을 주장했던 그날을 기억하나요? 아마 아주 사소한 것이었을 겁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주말에 만나는 건 어떨까?”
건강한 파트너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아, 그래? 알았어. 그럼 푹 쉬어.” 하지만 그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마 이 세 가지 중 하나였을 겁니다.
- - 노골적인 분노 (Aggression): “뭐? 지금 나 만나기 싫다는 거야? 너 요즘 변했어.” 그는 당신의 ‘피곤함’이라는 정당한 사유를, ‘자신에 대한 거부’라는 공격으로 왜곡했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관계를 소홀히 한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 - 수동적인 공격 (Passive-Aggression): “아… 괜찮아. 너 피곤하다는데 어쩌겠어. 그냥 나 혼자 있지, 뭐.” 그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고, 몇 시간 동안 당신의 연락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은 그의 그 서늘한 침묵이라는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당신의 피곤함을 사과하며 그에게 달려가야 했습니다.
- - 죄책감 주입 (Guilt-Tripping):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 된 것 같네. 난 그냥 너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내가 너 힘들게 했구나. 미안하다.” 그는 즉각적으로 ‘상처 입은 피해자’를 연기합니다. 당신은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잔인한 사람이 되었고, 당신의 ‘아니’는 철회되어야 할 ‘실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단 한 번으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모든 영역에서, 매일, 체계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당신의 옷차림, 당신의 친구 관계, 당신의 일, 당신의 말투.
그 결과, 당신의 뇌는 이 지독한 패턴을 학습했습니다. [ 나의 한계선 주장 = 처벌 (그의 분노, 침묵, 비난) = 고통 ][ 나의 한계선 포기 = 일시적 평화 (그의 칭찬, 안도) = 생존 ]
당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신의 성격이 물러터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신의 뇌가 선택한, 가장 처절하고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경계선을 포기하는 대가로, 관계의 평화를 겨우 유지했던 겁니다.
경계선은 벽이 아니라, 현관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가 없는 안전한 곳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일까요?
당신은 ‘경계선을 긋는 것’과 ‘벽을 치는 것’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한계선을 긋는 것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차갑고, 이기적이며, 타인을 밀어내는 행위라고 오해합니다. “나는 저렇게 까다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당신이 다시 건강한 울타리를 치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계선은, 당신을 고립시키는 10미터짜리 콘크리트 장벽(Wall)이 아닙니다.한계선은, 당신의 집을 보호하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현관문(Front Door)입니다.
벽은,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고립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현관문은, ‘당신이’ 주체가 되어,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들일 것임을 선포하는, 주체적인 선택의 상징입니다.
그와의 관계에서, 당신은 당신의 집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 아무나 들어와 당신의 물건을 훔쳐 가고, 당신의 공간을 어지럽히도록 방치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그는 아예 당신의 현관문 자체를 뜯어가 버렸습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집에 새로운 현관문을 다는, 아주 기초적인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의 집에 초인종을 달고, 문을 잠그고, 당신에게는 “아니, 지금은 곤란합니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음을, 당신의 뇌에 다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지독한 죄책감의 정체를 직시하다
이론은 쉽습니다. “그래, 현관문을 달자.” 하지만 당신이 막상 그 문을 닫으려 할 때, 어김없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 그것. 바로 ‘죄책감’입니다.
당신이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려 할 때, 직장 동료의 무리한 요구에 ‘안 된다’고 말하려 할 때, 당신의 내면에서는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너 정말 이기적이다.’, ‘너 때문에 분위기 망가지는 거 안 보여?’
이 죄책감. 이것은 당신의 본래 성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당신의 신경계에 심어놓은 ‘내재화된 처벌’ 입니다.
(65번 글에서 말했듯이) 당신은 그가 없어도, 그가 하던 방식대로 당신 스스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뇌는, 당신이 ‘아니’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과거에 그로부터 받았던 그 고통스러운 처벌(전기 충격)을 미리 예상하고, ‘죄책감’이라는 경보를 울리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한계선을 그으려 할 때 느껴지는 그 불쾌하고 끔찍한 죄책감은, 당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신호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 내가 지금 나의 영토를 되찾는, 아주 올바르고 건강한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죄책감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것입니다. 이제 그 감정의 소유권을, 그에게 정확히 돌려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아니’를 다시 연습하는 아주 작은 걸음
당신은 그동안 당신의 ‘아니’라는 근육을 전혀 쓰지 못했습니다. 그 근육은 완전히 퇴화하고 말라붙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은 당장 당신의 상사나 시어머니에게 달려가 “아니, 전 못합니다!”라고 외칠 수 없습니다. 그런 무리한 시도는 당신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만 남길 뿐입니다.
당신은, 갓 재활을 시작한 환자처럼, 아주 작고, 안전하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단계: 가장 안전한 곳에서 시작하기 (익명성)
당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지 않는, 익명의 상대에게 먼저 연습하세요. 카페에서, 당신이 원하지 않는 크림을 올려주려 할 때. “아니요, 크림은 빼주세요.” 옷 가게 점원이 부담스럽게 따라붙을 때.
“아니요, 그냥 저 혼자 볼게요.” 이것은 혁명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욕구를, 그 어떤 처벌의 두려움 없이, 관철시키는 첫 번째 성공입니다. 이 작은 성공의 경험이 당신의 퇴화했던 근육에 다시 피를 돌게 합니다.
2. 2단계: 안전한 사람에게 표현하기 (신뢰)
이제 당신의 ‘변함없는 친구’(63번 글에서 말한)에게 연습할 차례입니다. 당신이 그녀의 말을 100% 이해하지 못해도, 그녀의 조언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무조건 공감하고 받아들였던 그 습관을 멈춰보세요.
“네 말은 알겠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오늘 전화 통화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미안한데 10분만 하고 끊어도 될까?” 그녀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그 건강한 수용은, 당신의 ‘아니’가 관계를 망치지 않는다는 강력하고 새로운 학습 경험을 당신의 뇌에 심어줄 겁니다.
3. 3단계: 내면의 ‘아니’를 인정하기 (자각)
아직 입 밖으로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순간도 많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직장 동료가 또 당신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깁니다. 당신은 예전처럼 웃으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마세요. 마음속으로, 혹은 일기장에, 당신의 진짜 감정을 명확히 써보세요. ‘사실 나 이거 하기 싫다. 지금 내 기분은 아주 불쾌하다.’
이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이 더 이상 당신 자신을 속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자기기만을 멈췄다는 엄청난 진전입니다.
당신의 감정을, 당신 스스로가 인정하고 검증해주는 이 행위가, 당신의 무너진 한계선을 내부에서부터 다시 세우는 가장 단단한 기초 공사가 될 겁니다.
당신의 ‘아니’는, 당신의 존엄이다
한계선을 다시 긋는다는 것은, 누군가와 싸우겠다는 선전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영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선언입니다.
당신이 ‘아니’라고 말할 때, 당신은 상대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을 때, 당신은 상대방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그 선명하고 단호한 ‘아니’는, 당신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를 존중하기 때문에 나오는,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네’입니다. 당신 자신을 향한, 당신의 존엄을 향한, 가장 깊은 긍정입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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