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래도 그래도 날 사랑하니까…”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기이한 고요가 찾아온다. 그의 분노가 남긴 말의 파편들이 아직 당신의 마음을 떠다니고, 쿵쾅거리던 심장은 겨우 제자리를 찾는다.
폐허가 된 감정의 풍경 속에서 당신은 생각한다. ‘이건 아니야.’ 당신의 이성은, 당신의 본능은 비상벨을 울린다. 떠나야 한다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속삭인다. “그래도, 그 사람이 날 사랑하긴 해.”
이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이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이자, 가장 정교한 자기기만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편. 당신은 그것이 마약인 줄 알면서도, 그 순간의 위안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기에 기꺼이 스스로의 혈관에 주사한다.
나는 여기서 단언하고자 한다. 당신이 그의 폭력을 견디는 이유는 당신이 유별나게 관대하거나 사랑이 깊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모순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동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비극적인 생존 본능, ‘인지부조화’라는 심리적 건축술의 결과물이다.
인지부조화라는 마음의 건축
인간의 정신은 모순을 견디지 못한다. 마치 컴퓨터가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명령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역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믿음이 공존할 때 극심한 심리적 ‘정전기’를 일으킨다.
미국의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이 고통스러운 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학대 관계는, 이 인지부조화가 가장 극적으로 펼쳐지는 무대다.
당신의 내면에서는 두 개의 강력한 믿음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 - 믿음 A: “나는 존중받아야 할, 가치 있고 지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당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당신이라는 존재의 근간이다.)
- - 믿음 B: “나는 나를 모욕하고, 통제하고, 상처 주는 사람 곁에 머물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매일 마주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두 믿음의 충돌이 일으키는 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치 있는 나’와 ‘가치 없는 대우를 받는 나’ 사이의 간극은, 당신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흔드는 실존적 위기다.
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마음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바꾸거나 왜곡해야만 한다.
여기서 마음은 가장 손쉬운 길을 택한다.
행동(믿음 B의 현실)을 바꾸는 것, 즉 관계를 떠나는 것은 물리적, 감정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며, 때로는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과업이다.
반면, 생각(믿음 A 또는 B에 대한 해석)을 바꾸는 것은, 비록 자신을 속이는 일일지라도, 당장의 고통을 줄이는 데에는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마음은, 당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비극적 현실을 재해석하는 위대한 건축가가 된다.
- - 현실의 재구성: 마음은 믿음 B의 현실, 즉 ‘학대’라는 단어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단어를 써넣는다. “이것은 학대가 아니다. 이것은 서툴지만 격렬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의 통제는 나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깊은 애정의 증거다.” 당신은 그의 폭력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가치 있는 나’가 ‘가치 있는 대우(특별한 사랑)’를 받고 있다는, 뒤틀렸지만 일관성 있는 논리를 완성한다.
- - 기억의 큐레이팅: 당신의 마음은 유능한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기억을 선별하고 전시하기 시작한다. 99%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은 ‘수장고’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고, 단 1%의 행복했던 기억들—관계 초기의 황홀했던 순간, 그의 눈물 어린 사과, 아주 가끔 보여주는 다정함—만을 가장 밝은 조명 아래 전시한다. 당신은 그 전시된 기억들만이 이 관계의 ‘진실’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래, 원래는 저런 사람이었어. 지금은 잠시 힘들 뿐이야.”
- - 가해자의 변호: 당신은 그의 가장 유능한 변호인이 된다. 그의 불행한 유년 시절,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사회에 대한 불만 등, 그의 모든 폭력적 행동에 대한 정상참작 사유를 필사적으로 찾아낸다. “그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야. 세상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지.”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가해자를 동정받아 마땅한 ‘상처받은 영혼’으로, 그리고 그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자신을 ‘성숙하고 헌신적인 연인’으로 격상시킨다.
이 정교한 심리적 건축술을 통해, 당신은 마침내 고통스러운 모순에서 벗어나, ‘나는 나를 깊이 사랑하는, 상처받은 사람 곁을 지키는 헌신적인 연인이다’라는,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자기 서사를 완성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편
그렇다면 왜 하필 ‘사랑’이라는 이름일까? 왜 우리의 마음은 그 수많은 자기기만의 방식 중에서, 유독 “그래도 날 사랑하니까”라는 주문을 선택하는 걸까?
나는 이것이 ‘사랑’이라는 개념이 가진 독특한 속성, 즉 고통을 신성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이 모든 부조리를 견디게 하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아편이다.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만약 그의 폭력이 그저 의미 없는 폭력일 뿐이라면, 그 관계에 머무는 당신의 삶 역시 무의미한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감당하기 힘든 실존적 공허다.
하지만 여기에 ‘사랑’이라는 마법의 가루를 뿌리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 - 고통의 신성화: 그의 폭력은 더 이상 무의미한 상처가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랑’을 위해 내가 치러야 할 ‘희생’이자 ‘시련’이 된다. 당신의 고통은 의미를 얻고, 당신은 그 고통을 견뎌내는 순교자가 된다. 당신은 더 이상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비극적 사랑의 숭고한 주인공이 된다.
- - 미래에 대한 담보: ‘사랑’은 이 모든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행복으로 바꿔줄 것이라는 약속어음과 같다.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니까, 언젠가는 이 모든 시련이 끝나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이 희망은 현재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마취제다. 당신은 미래라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담보로, 현재라는 실재하는 시간을 저당 잡힌다.
- - 매몰비용의 합리화: 당신은 이 관계에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과 감정, 그리고 당신의 인생 자체를 투자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당신의 투자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파산 선고와 같다. 인간은 이 ‘매몰비용(sunk cost)’을 포기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그래도 날 사랑하니까”라는 믿음은, 이 실패한 투자에 계속해서 자금을 쏟아붓게 만드는 마지막 미련이자, 가장 강력한 합리화의 기제다.
“그래도 날 사랑하니까”라는 말은 그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고, 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당신의 처절한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자기 최면이다.
이 글을 읽는 것이 당신에게는 고통스러울 수 있다. 당신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그 유일한 믿음,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가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가장 잔인해 보이는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래도 날 사랑하니까”라는 주문은, 당신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그 관계라는 감옥 안에 스스로 머물게 하는, 가장 교묘한 형태의 심리적 창살이다.
이 주문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아직 내게는 없으니까.”
이 자기기만의 정교한 설계도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스스로에게 걸었던 마법을 푸는 첫 번째 열쇠다.
당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자기 방어였음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비로소 그를 향한 미련이 아닌, 스스로를 향한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치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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