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주(烹主)란 찻자리의 주인, 즉 차를 내려 대접하는 호스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차는 뜨거운 물에 여러 차례 우려 작은 잔에 담아 마시기에 이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음미하는 자리를 중요히 여겼다. 서울 북촌에 자리한 티룸 월하보이의 주은재 대표는 방문객들과 차를 나누는 팽주다. 차와 기물을 수집해온 부모의 영향으로 유년 시절부터 차를 가까이 접했고, 2020년 자신만의 다구와 차 컬렉션을 갖춘 다실 월하보이를 열었다.
‘달 아래 차를 마신다’는 뜻의 이름 때문일까. 길가로 난 작은 창 두 개가 전부인 월하보이는 낮에도 실내가 어둑하다. 창턱을 겨우 넘은 어슴푸레한 햇빛이 꼭 달빛처럼 느껴지는 아늑한 공간. 8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벽돌 건물은 과거 은장도 상점과 가죽 공예 상점이 있었던 자리다. 건물 내부에 가벽과 천장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주은재 대표는 이를 모두 걷어내고 본래 형태를 복원했다. 또 하나의 독특한 요소는 공간 한 면에 비스듬히 들어선 돌 담벼락이다. 1970년대 강남구로 이전한 옛 경기고등학교의 축대로, 부지를 침범한 벽이지만 120년 역사의 담을 유지하고 싶었던 대표는 그마저 품기로 했다. 동굴 같은 공간은 축대 덕인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단다. 골동품과 고미술품을 애호하는 그가 오래된 것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전국에 카페만 10만 개가 넘는 커피 강국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커피를 찾지만, 차 문화는 조금 낯설지 모르겠다. 차호에 찻잎을 우려 공도배에 옮기고 작은 찻잔에 담아 음미하는 과정은 바삐 흘러가는 일상에서 이질적인 리듬으로 다가온다. 차 용어도 어쩐지 어렵다면 주은재 대표의 공간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다구를 살펴보자. 한자 기반의 여러 용어가 혼용되고 있지만 그가 일상적으로 차를 내리는 기물은 다음과 같다. 보이차를 우리는 자사호(중국 이싱 지역의 자사토로 빚은 차호), 우린 차를 옮겨 담는 공도배, 물을 끓이는 탕관, 그리고 잔이 기본이다. 여기에 찻잎을 담는 작은 그릇 다하, 찻잎을 옮기는 긁개인 차시, 다관 뚜껑을 받치는 개치, 차를 버리는 퇴수기 등이 포함된다.
차판을 지키는 다우(茶友)도 빼놓을 수 없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총애하는 장식물이라는 의미에서 차총(茶寵)이라고도 부르는데, 주은재 대표 곁은 ‘구리’라는 이름의 개구리 모양 다우가 10년 넘게 지키고 있다. 원래 노란색이었던 개구리 차총은 찻물이 들어 이제 어두운색을 띤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차 친구의 묘미다. 음료를 마시듯 즐긴다면 차는 결코 먼 존재가 아니다. 다정한 다우까지 함께한다면 주은재 대표가 그랬듯 금세 향긋하고 매력적인 액체에 스며들 것이다.
1 주은재 대표. 벽에 걸린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이 월하보이의 기물을 그린 작품이다. 2 차시를 활용해 다하에 담긴 찻잎을 자사호에 옮기는 모습. 곁에는 개구리 모양 다우가 놓여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차를 접했다고. 어떤 차를 주로 마셨는지 전해 들었나? 부모님이 인사동 전통 한옥 건물에 박물관을 운영했는데, 그곳에 ‘만하루’라는 다실이 있었다. 보이차뿐 아니라 6대 다류인 녹차, 백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를 모두 다루셨다. 어머니가 이야기하길 여섯 살쯤부터 어두운 계열의 차를 함께 마셨다고 하더라. 차는 색이 진할수록 카페인 함량이 낮아 아이들도 함께 마실 수 있다. 초등학생이 된 후로는 밖에서만 놀아 까만 콩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때는 열을 떨어뜨리는 녹차, 백차 계열의 연한 차를 마셨다고 한다. 사실 차를 마신 것보다 기물을 가지고 놀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운 좋게도 삶 속에 늘 차가 당연한 것처럼 존재했다.
처음 소장한 다구는 무엇인가? 중학생 때 용돈을 모아서 처음 산 10만원 남짓의 자사호다. 사실 이전에도 내 잔은 많았다. 가족 여행을 가면 늘 고미술 상점이나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부모님이 옷은 잘 안 사주셔도 ‘이 잔을 팽주 잔으로 쓰고 싶다’고 하면 곧잘 사주셨다. 첫 자사호는 붉은색을 띠는 잘록한 배 모양의 이형호로 기억한다. 내 눈에는 참새 같은 모양이 예뻐서 데려왔다. 산산조각 나서 지금은 없지만, 그때 킨츠기 수리 기법을 알았더라면 오랜 시간이 걸려도 수선했을 것이다.
일찍이 독자적인 차 생활을 시작했나 보다. 세월은 길지만 중간에 멈춘 적도 있다. 20대 초반에는 직접 차를 내리기보다 부모님이 내려주시는 걸 마셨다. 다구보다 갖고 싶은 것도 많았고, 헬로 키티, 포차코 같은 귀여운 캐릭터도 좋아했다. 월하보이를 오픈한 이후로는 기물과 찻잎으로 귀여움을 충족한다.
찻잎이 귀엽다니? 물에 불린 찻잎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예컨대 잎이 활짝 열리면 어린 차는 속이 만질만질하고, 나이 든 차는 오돌토돌하다. 또 동방미인이라는 찻잎은 아리따운 무용수가 물속에서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이다. 흰 털로 덮인 백호은침은 새로 난 잎을 빠르게 채엽한 귀한 차인데, 물에 불려 콩깍지처럼 속을 열어 보면 작은 싹이 숨어 있다. (안을 보여주며) 정말 예쁘지 않나. 찻물이 끓으며 보글보글 기포를 뱉어내는 모양도 무척 귀엽다.
1 킨츠기로 수선한 잔과 유리 공도배, 자사호. 2 선반에는 차와 골동 기물, 고미술품이 진열되어 있다. 3 서로 다른 빛깔의 자사호. 왼쪽부터 단니, 자니, 주니, 흑니 자사호다.
취미를 넘어 차를 업으로 삼은 계기는 무엇인가? 10년 정도 캐나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당시 거주했던 밴쿠버는 유난히 홍콩 사람이 많은 도시였다. 차를 마시러 차이나타운에 자주 갔는데, 홍콩, 대만, 중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며 차를 마셨다. 그때가 차에 빠진 두 번째 시기라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개인 다실을 갖고 싶어 월하보이를 구상했다. 차를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가족과 차를 즐기고 새로운 차를 품평하는 일종의 차 연구실을 꿈꿨다. 2020년 2월 문을 열어 수집한 차를 두고 소꿉놀이하듯 즐겼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궁금해하면 돈도 안 받고 차를 한 잔씩 내어주기도 했고. 그렇게 1년쯤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지금과 같은 체계가 잡혔다.
가장 아끼는 다구를 소개한다면? 제일 애정이 큰 건 홍콩에서 들인 골동품 요변 자사호다.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에 산소가 잘못 유입되어 변형이 일어난 기물로, 일반 자사호와 달리 겉면이 거칠다. 하지만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 자사호는 숨을 잘 쉰다. (물을 부으며) 이렇게 물을 담으면 탄산 같은 소리가 나는데, 기공 사이사이에서 계속 기포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출수와 절수도 훌륭하다. 어찌 보면 미운 오리 새끼라 할 수 있는데,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는 아니지만 이 자사호만의 미학이 있다.
보통 어떤 디자인의 기물을 선호하나? 세련되고 미니멀한 형태를 좋아한다. 그리고 손으로 잡았을 때 편해야 한다. 부모님과도 취향이 비슷한데, 높은 안목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언젠가 손에 넣고 싶은 기물이 있다면? 기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차다. 차 생활의 세 가지 요소는 좋은 차와 기물, 그리고 물이다. 맛있는 차가 있다면 그에 맞는 물을 사용해야 하고, 그 물을 끓일 기물이 필요하다. 그렇게 기물을 찾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올해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햇차를 갖고 싶다. 20년 후면 정말 맛있는 차가 될 테니 후세를 위해서라도 지금 사둬야 한다(웃음).
한국 차도 즐겨 마시나? 물론이다. 녹차, 백차, 홍차를 갖고 있는데, 보통 녹차는 4월 말~5월 초에 채엽한 것을 여름에 다 소진한다. 여름이 오면 빙수를 찾듯 녹차는 여름에 마시는 차다. 한국 녹차를 안 마셨다면 아직 작년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웃음). 7월 말경에는 하동의 차 선생님을 모시고 한국 차 다회를 일주일 동안 열 예정이다.
1 기물을 집을 때 활용하는 집게. 2 옛 경기고등학교 축대가 안쪽 벽을 차지한다. 3 평소 차를 내릴 때 사용하는 다구들. 자사호와 공도배, 잔, 차총, 개치(뚜껑 받침), 집게가 필수적이다.
매일 차를 마시는 루틴이 있나? 아침에 출근하면 피로감을 날려주는 보이차 생차 계열을 주로 마신다. 중국 운남성의 빙도, 노반장, 이무 등 지역은 다양하다. 여름철에는 녹차나 백차, 우롱차 등 싱그러운 계열을 찾는다. 점심 식사 후에는 소화를 돕는 차를 많이 마시는데 요즘은 2005년산 무량산 고수 보이차를 좋아한다. 오후 4~5시 이후로는 카페인 함량이 낮은 오래된 보이차 생차나 숙차를 잠들기 전까지 마신다.
여전히 차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입문하는 게 좋을까? 우선 경험해보는 게 중요하다. 티백부터 시작해보자. 가장 먼저 추천하는 도구는 일회용 다시 백이다. 50장에 2000원이면 살 수 있다. 여기에 좋아하는 찻잎을 담아 텀블러에 마셔볼 것을 권한다. 50장을 다 쓸 정도로 꾸준히 마신다면 그때 기물을 들여도 좋다. 다음 단계로는 표일배라는 티포트가 유용하다. 찻잎을 넣은 뒤 물을 붓고 5~10초 우려 버튼을 누르면 차가 내려온다. 이것에 적응되면 개완, 그리고 자사호 순으로 업그레이드한다.
여행을 갈 때도 다구를 챙기나? 당연하다. 하나만 챙겨야 할 때는 자사호를 가져간다. 옷에 돌돌 말아 가방에 넣으면 깨지지 않는다. 해외에서는 평소 먹지 않는 음식을 접하는 경우가 많으니 소화를 돕는 보이차 숙차 계열을 지퍼백에 담아 준비한다.
만일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어떤 차를 마실 것인가? 내가 가진 차 중에 고른다면, 1950년대 생산된 소황인이 있다. 보이차가 가장 맛있는 햇수가 50~70년인데, 벌써 70년이 되었다. 보통 차를 우릴 때 3~5g 넣으라고 설명하지만, 나이가 많은 차일수록 향이 옅어 잎을 더 넣어야 한다. 소황인을 15g 정도 진하게 우려 마시고 싶다. 정말 맛있을 것이다.
얼마나 귀한 차길래? 한 편(약 357g)에 4500만원이다. 현재 1g에 22만원이니 15g 마시려면 330만원쯤 되겠다. 마지막 날이라 가능한 거다(웃음). 나이 많은 차를 품을 수 있는 골동 잔에 담아 마시고 싶다.
더네이버, 피플,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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