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베누 출신’이라는 말이 한국 다이닝 신에서 일종의 보증 수표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 빛나는 별을 획득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이 넘쳐나건만, 유독 샌프란시스코의 ‘베누’는 한국 셰프들 사이에서 일종의 성지순례 코스처럼 자리 잡은 인상이 짙다. 도대체 베누는 어떤 식당이며,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기 전 긴장감이 약간 앞섰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친절하게 안내한 오늘날 샌프란시스코의 모습은, 말하자면 예전처럼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텐더로인 근방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마약중독자로 넘쳐났고, 해가 지면 홈리스 텐트들,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아침이 오면 깨진 자동차 유리 파편이 처참하게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칫솔이라도 하나 사려면 직원 호출 벨부터 눌러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도시 곳곳이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나마 부둣가는 관광객과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로 여전히 활기를 띠는 모습이었다. 바다코끼리들의 꾸준한 태닝 루틴 또한 잠시나마 과거의 영광을 재생해주는 장면이었다. 홍콩식 오리 바비큐를 먹기 위해 방문한 차이나타운의 식당 주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많은 이들이 실리콘 밸리로 이주했고, 이곳에는 추억만 남았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쓸쓸한 풍경 속, 가끔씩 지나치는 전차만이 찬란했던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 그림자가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을 타고 길게 내려앉을 즈음, 한적한 거리 끝에서 베누를 만났다. 혼돈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정제된 모습으로 중심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입구에는 한국의 장독대가 놓여 있고, 큰 유리창 너머로 셰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요한 사찰과 분주한 실험실 풍경이 한 공간 안에서 인상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베누는 한국계 미국인 셰프 코리 리(Corey Lee)가 운영하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이다. 한국의 재료를 바탕으로 정교한 테크닉과 창의적인 조리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토마스 켈러 셰프의 프렌치 런드리에서 수년간 단련한 코리 리 셰프는 한국적 서사에 프렌치와 일본 기법을 융합하여 2010년 불사조라는 뜻의 베누를 열었다. 그리고 오픈 첫해 미쉐린 2스타, 2014년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미쉐린 3스타를 획득한 후 이를 무려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베누의 실내는 극도로 미니멀한, 여백의 미를 보여주었다. 모든 가구는 절제된 디자인을 선택했고 어느 한구석도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았다. 곳곳에 숨겨둔 돌과 식물, 한국 도예가가 빚은 옹기만이 미묘한 온기를 더하고 있었다.
동양적 감각과 서양적 기법이 한 접시 안에서 자연스레 공존할 수 있을까? 지나치게 한국적이지는 않을까, 요즘에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를 사용한 한국식 프렌치 식당이 서울에도 많은데 어떻게 차별화했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첫 번째 스몰 바이트는 천년 묵은 메추리알이라는 이름의 송화단이었다. 중국식 송화단의 등장은 예상 밖이었다. 생강즙, 차이브, 닭 육수로 걸쭉하게 만든 연두색 소스 위에 올린 젤리 모양의 매추리알 송화단은 거북한 맛 없이 깨끗한 향이 부드럽고 산뜻한 스타터였다.
두 번째 스몰 바이트는 당면과 채소로 속을 채운 홍합이었다. 훈연 향이 밴 홍합은 적절하게 마리네이드해서 도자기처럼 만들만들했고, 속을 채운 당면과 얇게 썬 오이, 당근, 호박, 달걀 흰자, 노른자 편을 겹겹이 말아낸 가지런한 모양이 마치 색동저고리처럼 예뻤다. 바다 향이 당면의 쫀득함과 채소의 아삭함, 그리고 간장 베이스의 마리네이드와 함께 깊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작은 홍합 속을 정교하게 채운 모양부터 인상적인 접시는 완벽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국, 프랑스, 일본, 중국의 디테일을 모두 담아냈다.
세 번째 스몰 바이트는 성게 요리로, 산타바바라 해역에서 잡은 최상급 성게를 한우 안심 타르타르와 게젓에 마리네이드한 블루 크랩 살을 섞은 베이스 위에 올린 후, 쌀로 만든 작은 타르트 셸 위에 얹은 것이었다. 입에 넣은 순간 사각 부서진 셸은 고소한 맛으로 시작해서 게젓의 은은한 발효 향과 타르타르의 육즙이 뒤섞인 깊은 감칠맛으로 이어졌고, 달고 크리미한 성게의 풍미가 길게 혀를 자극했다. 마치 찰리의 초콜릿 공장에서 윌리 웡카가 선보인 마법의 껌같이 씹을수록 맛이 변해갔다.
네 번째 스몰 바이트는 잘 손질한 정어리 필레를 찹쌀로 만든 브리오슈 위에 올린 것이었다. 한입에 바삭하게 부서지는 토치된 브리오슈, 초절임한 정어리의 기름진 감칠맛이 기분 좋은 산도로 입안을 채웠고, 어린 고수 잎이 밸런스를 잡아주었다.
다섯 번째 스몰 바이트는 베뉴의 시그너처 메뉴로 꼽히는 국화 모양의 두부 요리였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순두부가 수백 가닥의 꽃잎으로 단장된 모습은 정교한 테크닉의 하이라이트였다. 가쓰오부시와 가리비 게장으로 맛을 낸 육수 위에 얹은 주황색 즙이 화려함을 더했다. 두부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풀리고, 맑은 다시의 따뜻한 감칠맛이 여러 소스와 교차되며 섬세하고 길게 여운을 남겼다.
메뉴에는 ‘Small Delicacies’라고 간단하게 표기된 작은 한입들의 향연은 예상보다 오래 여운을 남겼고, 기대를 뛰어넘는 정성스러운 디테일로 가득했다. 메인 코스의 시작은 랍스터 코랄 샤오룽빠오로, 블루 랍스터라는 재료가 동서양의 교차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랍스터를 메인으로 프렌치 콩소메의 풍미가 샤오룽빠오의 얇은 피 안에 잘 담겨 있었다. 뒤를 이은 새우장을 곁들인 백반처럼, 한국인의 기준으로는 다소 평범한 한식 메뉴 곳곳에도 베뉴만의 재치 있는 변주를 가미했다. 메추리 요리는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컸던 메인 요리로, 셰프가 직접 선정한 캘리포니아 울프 랜치 농장에서 사육한 메추리는 이제까지 봤던 메추리 종보다 지방층이 두툼하고 오리처럼 껍질이 깔끔하다.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질 좋은 메추리, 비둘기, 기니파울 등을 외국에서는 즐겨 먹는데 특유의 육향과 감칠맛은 감탄을 부른다. 예상대로 메추리는 잘 숙성된 후 훈연, 글레이즈되어 고소하면서도 깔끔하고, 감칠맛이 풍부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디저트에는 잠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직접 공수한 샤인머스캣이 자랑스러운 특산품처럼 소개된 것. 방금 한국에서 날아온 방문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디저트임에도 불구하고 베누에서의 경험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프렌치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국, 프랑스, 일본, 중국, 미국의 맛이 공존하는 디시들은 단순히 한국의 재료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극명하게 담아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방을 큰 유리창 너머로 다시 바라보았다. 식사 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마치 군대처럼 절제된 스태프들의 움직임을 통해 셰프의 완벽주의와 디테일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식의 풍미를 즐기러 온 손님에 대한 배려와 철학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졌다.
요즘 서울의 미식가들은 단순히 요리를 잘하는 수준을 넘어 디테일에 집착하는 셰프를 만나면 묻는다. “혹시, 베누 출신이신가요?” 그리고 놀랍도록 자주 그렇다는 대답을 듣는다. 모수의 안성재 셰프를 비롯해 이타닉가든의 손종원 셰프, 트리드의 강승원 셰프 등이 모두 베누를 거쳤다. 동아시아 정신과 프렌치 테크닉의 조화, 극도의 디테일과 절제미를 보여준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다. 베누의 정신을 서울에 성공적으로 옮겨놓은 또 하나의 공간을 꼽자면 청담동에 위치한 레스토랑 산이다. 산의 조승현 셰프는 샌프란시스코의 베누에서 오랜 기간 수셰프로 일했다. 화려한 도심 한복판,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고요하고 단정한 공간이 펼쳐진다.
산은 베누를 똑 닮았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호흡을 지닌다. 미니멀하지만 건조하지 않고,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압도하지 않는다. 나무와 돌의 질감, 자연광을 받아들이는 방식 하나까지 섬세하게 설계했다. 음악은 없고, 대화는 낮은 톤으로 깔린다. 창밖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까지 접시에 얹어 내오는 마지막 소스처럼 공간의 일부가 된다.
산의 요리는 계절감 있고 식재료에 대한 진지한 존중이 느껴진다. 랍스터, 보리멸, 한치, 병어, 전복, 밀면으로 이어지는 한 끼 식사는 마치 장르 문학처럼 기승전결을 갖추고 흐른다. 한 입마다 계절의 서사가 펼쳐지는 셈이다. 하지만 산이 단지 베누의 유산을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신을 품은 채,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베누가 백색광이라면, 산은 훨씬 더 낮은 조리개 값을 지닌 따뜻하고 촉촉한 빛이다. 여전히 날카롭지만, 그 안엔 인간적인 여유와 다정함이 스며 있다. 베누가 ‘T’ 라면 산은 ‘F’에 가까운 음식이랄까.
접시 위 구성은 절제됐지만, 여백 속 오히려 부산 사나이 특유의 정서가 묻어난다. 미감의 설계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서적 기억에서 시작된다. 어릴 적 시장통에서 본 생선, 어머니가 담근 명란젓의 짠맛. 이 모든 것에 훌륭한 테크닉을 덧입혀 나란히 접시에 올린다. 그 대표 요리는 셰프가 새롭게 해석한 부산 밀면이다. 테이블마다 면을 얹어주는 퍼포먼스부터 그만의 오리지낼리티를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지금 산은 서울에서 예약이 아주 어려운 식당 중 하나다. 서울과 부산, 그리고 베누라는 교차점 위에서, 셰프 조승현은 묵묵히 자신의 언어로 요리한다. 베누의 실험 정신과 극도로 정교한 디테일은 오늘도 서울 미식 신에서 그 예리한 칼날을 한층 날카롭게 벼리고 있다.
베누
1 천년 묵은 메추리알. 송화단을 오마주하여 메추리알을 숙성하고 닭 육수 베이스의 녹색 브로스를 깔아 완성한 스타터.
2 당면과 채소로 속을 채운 홍합. 간장으로 마리네이드한 홍합 안에 당면과 채소들을 색동저고리처럼 채워 넣고 훈연했다.
3 성게, 게젓, 비프 타르트. 산타바바라 해역에서 잡은 성게와 한우 타르타르, 그리고 블루 크랩을 발효시킨 소스로 만든 타르트.
4 정어리 토스트. 태평양 정어리를 초절임하여 튀긴 브리오슈 위에 어린잎과 올려 제공한다.
5 국화 두부. 화이양 요리 기법을 오마주하여 순두부를 수백 가닥으로 잘라 국화 모양으로 만들고 클리어 브로스와 같이 담은 수프.
6 바비큐 메추리. 울프 랜치에서 사육한 메추리를 숙성, 훈연, 글레이즈하여 로스팅한 메인 요리.
산
1 오세트라 캐비아와 대게. 대게를 캐비아와 치킨 크림, 달걀노른자 푸딩과 함께 브리오슈에 올려 먹는 스타터.
2 콜라비 꽃. 조각한 콜라비를 토마토로 속을 채우고 차이브와 함께 허브 버터 소스 위에 올렸다.
3 보리멸 튀김. 보리멸을 덴푸라 방식으로 튀겨 레몬 소스와 시트러스 메리골드를 함께 낸다.
4 한치 숙회. 잘 조리된 동해안 한치에 미나리와 가지 절임을 곁들이고 먹물초장과 관자를 함께 낸다.
5 덕자 병어. 큰 병어를 다시마찜에 싼 요리. 랍스터 젓갈과 오믈렛 라이스를 함께 제공한다.
6 부산 밀면. 재래 돼지 육수를 사용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부산 밀면.
writer Jeik Byun(미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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