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이지은 기자] 연예인과 제작진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은 더 이상 ‘방송국 갑질’이라는 익숙한 표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묵인돼온 방송 제작 시스템의 폐단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예능이든 드라마든 출연자들은 ‘하차’라는 말로 포장된 채, 어느 날 아무런 설명도 없이 프로그램에서 사라진다. 상의는커녕 최소한의 통보조차 없는 사례가 허다하다. 물론 제작 여건상 출연자 교체나 하차는 불가피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정당하지 않다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는 ‘출연자와 협의 끝에 하차하기로 했다’는 말이 따라오지만, 당사자가 받은 건 문자 한 줄, 혹은 연락 두절일 뿐이다. 제작진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다음 녹화를 강행하고, 출연자의 부재는 늘 그럴듯한 이유로 덮인다. 연예인 스스로가 “기사를 보고 내가 하차한 줄 알았다”라고 말할 만큼, 통보의 시기와 방식은 점점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차’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말일뿐, 그 안에 들어있는 실상은 말 그대로 ‘강차’에 가깝다. 출연자의 동의 없는 하차는 퇴출이고, 침묵을 강요받은 하차는 사실상 해고다. 그러나 최근 이 오래된 침묵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이미지 손상을 우려해 입을 다물던 연예인들이 이제는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4년 사이 연기대상만 3개를 받은 배우 남궁민은 대본 리딩을 하고 식사까지 마쳤으나 작품에서 하차 당했다고 밝혔다.
17일 방송된 SBS ‘틈만 나면’에서는 SBS 새 금토드라마 ‘우리영화’ 주연 배우 남궁민, 전여빈, 이설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날 여의도를 찾은 남궁민은 “방송국에서 많이 혼났던 기억이 되살아난다”라며 무명 시절 일화를 털어놨다. 유재석 역시 “그때 감독님들은 진짜 무서웠다. 궁민이도 긴 세월 고생하지 않았냐”라며 공감했다.
남궁민은 “저는 예전에 대본 리딩을 하고서 잘린 적도 있다. 리딩 끝나고 식사 자리까지 가졌는데, 저 혼자만 잘렸다. 남은 사람들이 TV에 나오는 걸 볼 때 마음이 아프더라”라고 폭로해 충격을 안겼다.
이어 “여태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시상식에서 보면 ‘너도 살아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간다”라고 토로하자, 유재석은 “힘든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런지 동지애 같은 게 생긴다”라며 거친 연예계에서 함께 견뎌온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유대감을 언급했다.
배우 이제훈도 과거 갑작스럽게 하차 통보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5월 3일 방송된 KBS1TV ‘아침마당’의 ‘화요초대석’ 코너에 출연한 이제훈은 “군대 가기 전에 대학로에 있는 극단에 가서 열심히 허드렛일도 하고 선배님들과 연출님이 가르쳐 주시는 걸 배우면서 조금씩 연기를 습득하는 기회가 됐다”라며 “사실 연극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저에게 또 새로운 창작극의 주인공으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자랑도 했다”라며 “설레는 마음으로 연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선배들과 연출님이 ‘아직 너는 주인공으로 연극에 서기엔 배우로서의 자질과 자세가 부족한 거 같다’면서 하차 통보를 내리셨다”라고 털어놨다.
이제훈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말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대 노인의 작은 역할이라도 해볼래’라고 하시더라”라며 “잠깐 나오는 역할이었는데 제가 그때 주저하지 않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해서 그렇게 무대에 처음 섰던 기억이 난다”라고 토로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배우 차청화는 과거 MBC 시트콤에서 하차당했던 경험을 고백했다.
차청화는 11일 방송된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제가 MBC에서 데뷔 때부터 엄청 많은 일이 있었다. 20대 때 MBC에서 오디션을 봤다. 그때 MBC에서 시트콤이 난리가 났다. 그게 됐다. 말이 안 되게 큰 기회였고 큰 배역이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열심히 준비해서 촬영을 갔다. 저는 공연 쪽만 하고 있어서 드라마를 잘 몰랐다. 연기도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제작진이) ‘뒤집습니다’라고 하더라. 나는 ‘뭘 뒤집지? 방금 연기했는데 이걸 왜 또 해야 되지’ 싶었다. 카메라를 아예 몰랐다. 정말 심각하게 무지했다”라고 덧붙였다.
차청화는 “제작진이 난리가 났다. 학원이 아니라 나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촬영을 가던 도중에 하차 통보를 받았다”라며 “지금은 이해한다. 당연히 상업주의니까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때는 너무 (속상했다). MBC가 나를 기쁘게 뽑아주고 그렇게 하차 통보를 했다”라고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다.
방송인 박소현, 임성훈 역시 26년간 진행했던 SBS 대표 장수 프로그램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하차했다.
박소현은 지난해 10월 ‘비보티비-한차로 가’에 출연해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가 끝나고 2024년에 마음이 되게 안 좋았다. 임성훈 선생님과 내가 1회 때부터 26년을 했다. 그러니까 데미지가 세게 왔다”라고 밝혔다.
이에 송은이는 “내가 아는 박소현은 그런 거에 별로 데미지가 없는 사람인데 정말 고생했다”라며 위로했고, 박소현은 “맞다. 원래 그런 사람인데 이번에는 완전 크게 왔다”라고 고백해 강제하차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방송계에서 오랜 시간 당연하게 통용돼 온 제작진 중심의 권력 구조, 이제 그 정당성을 질문받아야 할 때다.
이지은 기자 lje@tvreport.co.kr / 사진= TV리포트 DB,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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