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세상과 거리를 두자, 사람만큼 멀어진 간격을 사랑과 이별과 고독이 메우고 있다.”
▲시 한 편
<멈출 수 없는> - 전윤호
그 화산은 오랫동안 조용했지
높지도 않고
구름 아래 밋밋한 고개를 숙였지
깊은 밤 가래 끓는 기침 소리 들리면
혀를 차며 말하곤 했어
찬바람만 불면 꼭 저러네
가끔 안색이 바뀌면
바닥이 조금 흔들리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죽어 살아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마그마가 가슴까지 차올라
한 번의 모욕이면 충분한 폭발까지
저 폼페이는 전혀 몰랐네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위험을
그게 바로 나야
그게 바로 너야
▲시평
이 시는 숙호충비(宿虎衝鼻), 즉 ‘자는 호랑이의 코를 찌른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공연히 건드려서 화를 입거나 일을 그르침을 이르는 말이다. 오랫동안 활동을 멈춘, 높지도 않은 화산은 고요히 침묵하고 있다.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는 화산은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폭발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약한 지진이 발생하지만, 오랜 세월 휴화산 상태를 유지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모욕”이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오랫동안 조용”히 사는 시인을 누가 모욕했을까. 주변에 사는 이들이, 혹은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나를 모욕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시는 나를 모욕하면 화산처럼 폭발한다는 은근한 경고를 담고 있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가래 끓는 기침 소리”나 “가끔 안색이 바뀌면/ 바닥이 조금 흔들”린다는 것은 모욕이 한 번이 아니라 지속해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첫 번째 모욕에 “저 깊은 곳”에 숨죽여 있던 마그마가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모욕에 어느새 “가슴까지”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위험하다. 하지만 상대(들)는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경고를 허투루 들었을 수도 있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폼페이”를 끌어온다. 폼페이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기슭에 있던 고대 도시다. 한때 번성했으나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매몰된 도시다. 한번 폭발하면 파장이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미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다 파묻어버리겠다는 살벌한 경고다. 그럴 만한 힘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고, 나를 모욕하는 사람이 “바로 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 화를 자초하지 말라는 말이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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