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청춘이란 찰나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 영화, 음악,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저마다의 생에서 건져 올린,
불완전하게 반짝이는 청춘의 조각들.
그레타 거윅의 영화들
영화 <프란시스 하>의 흑백 화면 속에서 뉴욕 거리를 내달리는 프란시스.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막 해보는 것도 좋아”, “우리는 세계를 접수할 거야”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거대한 꿈을 향해 ‘우당탕탕’ 나아가는 그의 모습이 내게는 마치 청춘의 초상 같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생기를 잃지 않는 프란시스를 표현한 이후, 그레타 거윅은 목표를 전부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방황 중인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브룩’이,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뜻밖의 결심을 하는 <매기스 플랜>의 ‘매기’가 된다. 그렇게 엉뚱하면서도 능동적인 여성들을 그려가다 첫 단독 연출작인 <레이디 버드>를 통해 10대 소녀의 삶을 비춘다. 가족, 친구, 연인 등 다방면의 고민을 끌어안은 채 성장통을 겪는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접하며 혼란과 방황, 성장이라는 청춘의 다채로운 면면을 발견한다. 이는 분명 10대에서 20대로, 20대에서 30대로 이어지는 청춘을 지나는 여성의 여정에 대한 그레타 거윅의 오랜 탐구와 애정에서 비롯되었을 거라 짐작해보면서 말이다. 김선희 피처 에디터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막 해보는 것도 좋아.”
<프란시스 하> 중에서
영화 <녹색 광선>
애써 믿어보는 마음을 생각한다. 온갖 무의미 속에서도 세상에 다리를 붙이고 굳게 서 있게 해주는 작은 희망 같은 것을.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 속 ‘델핀’은 혼자인 것이 외롭고 슬프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역시 불편하다. 홀로 휴가를 보내게 된 델핀은 여행 내내 눈물을 흘린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나를 설명하고 또 증명해야 하는 것이 버겁고, 이상적인 만남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럽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려던 차에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 그와 함께 해변에서 ‘녹색 광선’을 본다.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하고, 자신은 물론 다른 이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게 해준다’는 전설을 지닌, 1초 남짓한 찰나에만 볼 수 있는 한 줄기 빛을 말이다. 청춘은 허무와 한 몸이 되기 쉽다. 세상에 갓 나온 이들이 낯섦 앞에서 작아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흔들리고 무너지기 쉬운 젊음에, 무의미에 맞서는 모든 이들에게 <녹색 광선>은 사소한 믿음의 가능성을 전한다. 그것이 한순간의 환상일지라도, 그저 우연에 불과할 지라도, 녹색 광선을 본 델핀이 작게 환호한 것처럼 말이다. 임수아 피처 에디터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젊음의 특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꿈꾸고, 절망하고, 무너지고, 그럼에도 다시 갈망하는 것.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을 보며, 이 영화를 만들고 절망하며 끝내 영화로운 순간을 맞이한 감독 타셈 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젊음’을 떠올렸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스턴트맨 ‘로이’와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진정으로 꿈꾼 것은 무엇일까. 28년 동안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17년간 영화 속 장소를 찾아다닌 감독이 그토록 바라던 영화는 어떤 것일까. 2시간 남짓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환상, 나의 젊음, 나의 절망과 갈망… 이런 생각들을 품었다. 2008년 첫 개봉 당시 영화의 부제는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었다. 17년 만에 다시 열린 그 환상의 문을 통해 잠시 어딘가로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강예솔 피처 시니어 에디터
영화 <리코리쉬 피자>
청춘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22년 겨울, 내 몸집만 한 이민 가방을 들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런던에 도착해 달스턴 곳곳을 누비던 날들. 하루는 숙소 근처 독립영화관 ‘리오 시네마’ 앞을 지나다 유리창에 적힌 ‘LICORICE PIZZA’라는 글자를 보고 홀린 듯이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당시 개봉한 지 하루 지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었다. 좌석이 10개 남짓한 비좁은 상영관에서 홀로 의자 깊숙이 파묻혀 화면 가득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여름 풍경을 눈에 담던 그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마침 영화는 어른이 되고 싶어 허둥대는 두 청춘의 이야기였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자신의 삶에 확신이 없는 채로 표류하듯 살아가는 스물다섯 여자 ‘알라나’, 물침대와 핀볼 게임장을 비롯해 온갖 사업을 벌이며 어른인 체하는 열다섯 살 소년 ‘게리’.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영화 내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다 그 유치한 싸움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걸 제쳐두고 전속력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도, 청춘도 그 안에 있을 땐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 하고. 안유진 피처 에디터
김진아 감독의 영화와 그의 말
1992년, 윤금이 피살 사건으로 촉발된 시위에 참여하며 스무 살의 한 청년은 엄청난 부채감을 느꼈다. “저를 포함한 또래 여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한 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이 공개된 일이에요. 대의를 위해 한 여성 피해자가 다시 한번 희생당하는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고, 언젠간 이 이야기를 윤리적인 방식으로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후 긴 시간이 흘렀지만, 청년은 그 다짐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VR 작품인 미군 위안부 3부작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을 완성해냈다. 김진아 감독을 만난 건 이 중 두 번째 작품 <소요산>이 공개된 이후였다. 2022년이었으니, 시위에 참여한 청년이 중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대화하는 내내 어쩐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스무 살의 청년 김진아인 것만 같았다. 왜 세상에는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지 묻는, 그래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라 생각한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청년. 그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며 확신했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그는 언제나 저항하는 청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개가 필요한 순간마다 그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강예솔 피처 시니어 에디터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가슴 뜨거워지는 낭만이나 열정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한 채로 20대를 그저 흘려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럴 때마다 200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꺼내 보곤 하는데, <네 멋대로 해라>도 그중 하나다. 스무 편에 이르는 에피소드를 밤을 새워가며 단숨에 봤다. 시한부 삶,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소재가 뒤섞인 이 드라마가 유독 새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작품 속 인물들이 정직하게 사랑하고, 또 살아가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를 일삼으며 인생을 낭비하던 ‘고복수’(양동근), 아버지의 반대에도 인디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살아가는 ‘전경’(이나영), 복수의 오랜 연인 ‘송미래’(공효진). 명쾌한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세 사람은 오로지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제 멋대로’ 나아간다. “좋아해도… 되나요?”라며 경이 고백하자 공중제비를 돌며 온몸으로 기뻐하는 복수, “살 때 죽어 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 있지 말”라던 경, 사랑이란 무엇이고 믿음이란 무엇인지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미래. 그저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울고, 웃고, 부딪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내게는 여전히 가장 이상적인 청춘의 얼굴이다. 안유진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