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과 이에 따른 글로벌 정세의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유럽연합(EU)이 경제, 금융, 전략적 자율성 강화를 위한 조치를 본격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유로 개발은 단순한 금융 혁신을 넘어 유럽의 주권 회복과 대외 의존도 감소를 위한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는 3월 21일 보도에서, 유럽이 수년간 지연됐던 주요 정책 과제를 재정비하며 추진력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통일된 자본시장 구축, 에너지 개혁, 국방 협력 확대 등과 함께 디지털 유로화 개발은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당면한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암호화폐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스테이블코인 등 디지털 자산을 지지해왔다. 특히 달러와 연계된 민간 디지털 통화에 대한 미국의 지지 확산은 유럽의 금융 주권에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유럽중앙은행(ECB)은 개인과 기업의 결제 수단으로 중앙은행이 직접 통제하는 디지털 유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ECB 라가르드 총재는 최근 회의에서 “디지털 유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U 정상들은 3월 20일 정상회의에서 디지털 유로의 추진이 유럽 경제 안보와 글로벌 경쟁력,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 강화를 위한 전략적 조치임을 확인했다.
ECB 집행이사 필립 라이언은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사용될 경우, 중앙은행이 통화 생태계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미국 달러 기반의 디지털 자산이 유로존 결제 시스템에 침투하면, 통화 주권이 약화되고, 금융안정성에 심각한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현재 민간 기업들도 디지털 결제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페이팔은 최근 중소 상인을 대상으로 스테이블코인 PYUSD를 활용한 결제 솔루션 도입 계획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상업화를 시도 중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EU는 디지털 유로화를 통해 주도권을 되찾으려 한다. 피에르 그라메니아 유럽안정화기구(ESM) 총재는 “디지털 유로는 유럽의 통화 주권과 전략적 자율성 수호를 위한 수단”이라며 ECB의 관련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재무장관이자 유로그룹 의장인 파스칼 도노호 역시 글로벌 시장의 정치적 변화가 유럽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한 디지털 유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디지털 유로화 개발의 배경에는 페이스북의 리브라(Libra) 프로젝트에 대한 대응도 포함돼 있다. 당시 민간 기업이 막대한 사용자 기반을 바탕으로 금융 권력까지 쥐려는 시도가 유럽 당국에 강한 위기감을 안겼다. 또한 디지털화의 가속과 현금 사용량 감소 역시 디지털 유로 추진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스페인은행의 호세 마누엘 막스는 “현금은 전자상거래 등에서 결제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다”며, 디지털 유로가 공공재로서 무료이자 보편적인 결제 수단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현재 유럽의 결제 시스템은 비자와 마스터카드 등 미국계 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결제 비용 증가와 더불어 전략적 자율성에 위협이 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 자문 이그나시오 트롤은 “유럽은 결제 수단을 ‘임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는 에너지에서 러시아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과거와 유사한 위험 구조라고 경고했다.
디지털 유로는 상인들에게 더 많은 결제 수단을 제공하고, 비용을 낮추며, 경쟁을 촉진해 유로화의 회복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10월 디지털 유로의 준비 단계가 종료되며, EU는 이를 다음 단계로 발전시킬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기술적 준비는 상당 부분 진전됐으나, 규제와 입법적 합의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프로젝트의 성패는 이제 정치권의 결단에 달려 있다.
차승민 기자 smcha@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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