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주의 인사이트] 뻔뻔한 미국 우선주의에 대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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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주의 인사이트] 뻔뻔한 미국 우선주의에 대처하는 법

뷰어스 2025-03-21 07:00: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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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12월 2일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를 통해 유럽국가들과 미 대륙간의 상호 불간섭과 유럽에 의한 미 대륙내 식민지 건설 배격이라는 외교방침을 밝힌다. 소위 먼로 독트린이다. 러시아, 프로이센 등 당시 유럽의 신성동맹 국가들이 미 대륙에 식민지를 회복시키려 하는 것에 대항해 대륙 안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기본 취지였다. 미국 고립주의로도 읽히는 이 방침은 유럽의 미 대륙 침략 의지가 쇠퇴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배했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18년 이후에야 미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상호협력과 질서 유지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선회한다. 이러한 새로운 입장은 제안자였던 우드로우 윌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윌슨주의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일견 종래의 먼로 독트린과 상반된 입장으로 보이는 윌슨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고 확산시키며,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집단 안보협력과 적극적 개입을 주장했다.

이는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기도 해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윌슨주의는 그 후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글로벌 리더 미국의 위상을 굳히는 토대가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윌슨주의는 국제 정치무대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을 주장하는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로 발전했다.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산시키며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미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국이 갖고 있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힘에 의한 타율적인 평화와 질서'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대외정책 변화는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신보수주의의 틀 안에서 미국은 세계 평화와 질서를 지키는 보안관의 역할을 자임했고, 전 세계의 인류가 세계시민의식(Global Citizenship)의 이상 아래 개방적으로 교류하도록 했으며, 자유무역을 국제경제의 기본 질서로서 수호했다.

미국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우리나라를 해방시켰고, 6.25 전쟁의 참극 속에서 우리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줬다. 식민통치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가 아시아 2위의 극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수출대국이자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와 군사안보 지원, 기술과 투자협력, 안정적인 수출시장 제공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을 함께 하는 미국이라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고도성장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60대 이상의 고령 세대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미국에 대한 선망과 고마움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러던 미국이 바뀌기 시작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제 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역사상 가장 '뻔뻔한' 미국 우선주의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역 상대국들에 대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미국인의 일자리와 소득을 도둑질해 갔다고 비난했다. 자유무역의 가디언이었던 미국이 WTO 룰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무역상대국들에 대한 관세 전쟁에 돌입했다.

중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기 위해 국제무대에서 사사건건 중국에도 시비를 걸었다. 자국이 주도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협상에서도 중국이 가입을 추진하던 시점에 스스로 탈퇴했다. WTO에서 무역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상소기구의 위원 선임을 미루어 사실상 기능을 정지시키기도 했다. 기후변화협약 등 여러 국제협약에서도 발을 뺐고, UN 산하 국제기구들에 내야 하는 분담금조차 줄이거나 제 때 내지 않아 기구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한국, 일본 등 우방국들에 대해서도 방위비 부담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큰 덩어리에서 소소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글로벌 리더 미국은 볼 수 없었다.

트럼프의 뒤를 이은 바이든 행정부도 일정한 명분은 지키려 했지만 트럼프가 주창한 미국 우선주의의 흐름을 바꾸진 못했다. 반도체, 2차 전지,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을 미국에 유치하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약속했고, 국제 무대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를 계속해 나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를 국제경제 무대에서 배제하고 러시아의 산업, 기술 발전을 저지하기 위한 각종 제재를 우방국들에 요구하기도 했다. 전 세계가 자유무역의 궤도를 이탈해 글로벌 마켓이 둘로 쪼개졌다. 공급망 대란이 세계적 규모로 벌어졌다.

2025년, 트럼프가 다시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제 더 거침이 없어진 고령의 트럼프는 관세를 무기로 전 세계의 시장과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가장 근접한 캐나다, 멕시코부터 대서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둔 유럽과 동아시아의 우방국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미국 덕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제 돈을 내라'했다. 온갖 거짓 통계와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매일 쏟아낸다. 19세기 초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우리 좀 건들지 말라'며 점잖게 말했던 고립주의가 21세기에 덩치 큰 불량배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 것이다. 1970년대 개발경제 시대에 우리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깐부' 미국은 더 이상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던 미국의 정신은 살아 있지만, 트럼프라는 변수로 인해 세계 경제와 정치질서가 잠시 교란되고 있는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이상 공짜 점심은 없다'는 트럼프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지난번 미국 대선 과정에서 우리가 듣던 언론 보도와는 달리 미국 내에서 트럼프에 대한 국민들 지지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트럼프가 벌이는 온갖 기행과 말들이 미국 국민들이 오랫동안 느껴왔던 불만을 대변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의도라기보단 지금 자국이 처해 있는 경제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는 동정 섞인 평가도 있다. 올 3월 기준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규모는 36조 2천억 달러에 달했다. 2024년 미국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23%에 해당한다. 매년 이자만 갚는데도 1조달러의 비용이 발생한다. 이는 새롭게 발생하는 재정 적자의 절반 규모다. 군사비, 연방정부 운영 등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적인 재정지출과 의료 복지 등 사회적 지출, 기존 부채에 대한 이자 지불만으로도 미국 정부가 질식할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기축 통화국으로서 전 세계에 달러를 공급해야 하는만큼 대규모 무역적자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이 때문에 미국인들의 비즈니스와 고용에도 적지 않은 피해가 누적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간단히 말해서, 지난 수십 년간 세계를 이끌어 왔던 미국의 리더십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글로벌 리더십의 비용은 우방국들에 청구하더라도 주도권 만큼은 계속 갖고 가고 싶은 것이 지금 미국의 내심이 아닐까 하는 싶다. 하지만 책임과 권력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주도해 온 일극체제는 시간의 문제일 순 있어도 결국 무너질 것이다.

건국 이후 항상 미국의 편에 서서 함께 성장해 왔던 한국은 이제 어떤 전략으로 눈앞의 난처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돈이 급해 'money'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트럼프에게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이념을 강조하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새로운 미국에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금전적 이익의 총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지금의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것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미 쇠약해진 미국이 국제 질서의 헤게모니를 놓지 않기 위해 어설프게 가치동맹에 목을 매던 바이든 정부 시절, 우리 경제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는 그때까지 러시아와 대규모로 협력해 왔던 많은 활동에서 철수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무역 거래도 크게 줄었다.

우리가 놓친 시장은 중국과 같은 경쟁국들의 차지가 됐다.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도가 86%에 달하는 우리 처지에서 글로벌 마켓의 특정 구역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다. 우리 경제의 미래에도 심각한 장애물일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식 배금주의는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 당장 트럼프의 미국은 적과 동지를 가르지 않고 모든 국가를 경제적 협상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미국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그동안 적대시해 왔던 대부분의 국가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캐나다 등 그동안의 오랜 우방 국가에 대해선 오히려 냉정한 계산서를 내민다. 모든 의사 결정에 '미국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이익을 원한다면 이익을 협상하면 될 일이다. 미국 시장에서 우리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방위비 협상에서도 더 많은 비율을 책임질 것을 요구받을 것이다. 미국이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선 관세도 두들겨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경쟁국들도 똑같은 부담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같은 조건의 경쟁이라면 우리에게 꼭 불리한 것은 아니다란 얘기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비용이 우리의 글로벌 마켓을 사수하기 위한 티깃이라고 한다면 이전의 가치동맹 우산 밑에서 시장을 통째로 내주던 것보다는 훨씬 나을 수 있다. 트럼프 2기는 명백한 각자도생의 시기지만 새로운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념적 동맹의 가치에만 연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대북 협력을 통해 고갈된 경쟁력을 확보하거나 일본, 대륙과의 물류, 교통, 에너지망 연결 등 지금까지 시도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회를 추구해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 앞에 멈추지 않는 무한한 창의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담대한' 의사 결정이다.


■ 박원주는 현재 중앙대 특임교수이자 삼성증권 사외이사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를 나와 행시 31회로 공직에 들어섰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정책과 에너지, 자원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으로, 문재인 정부에선 특허청장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을 자처하는 경제수석 당시엔 주로 기획재정부나 교수 출신이 선임돼 온 관행을 깨고 산업부 출신으로 처음으로 내정돼 화제였다. 그는 한국 경제와 산업, ESG에 대해 글을 풀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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