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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 분)이 제자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승부’는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바둑전설 조훈현 9단과 그의 제자였던 이창호 9단의 사제 서사와 뜨거운 대결 실화를 전격 영화화한 작품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병헌이 극 중 바둑의 황제로 불린 조훈현 국수 역을 맡아 싱크로율 넘치는 열연을 선보인다.
‘승부’는 당초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작품이었지만, 주연배우 리스크로 약 4년간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던 작품이다. ‘승부’는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가 최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배우 유아인의 주연작이기도 하기 때문. 마약 파문으로 유아인이 물의를 빚으면서, ‘승부’는 당초 예정했던 넷플릭스 공개를 잠정 연기했다. 결국 넷플릭스의 손을 떠나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배급을 맡게 되면서 넷플릭스가 아닌 극장 개봉으로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유아인은 조훈현의 제자인 이창호를 연기해 이병헌과 사실상 투톱 열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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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측은 극장 개봉 소식을 알린 이후 예고편, 포스터 등 홍보 과정에서 유아인의 모습을 지워 눈길을 끌었다. 최근 공개된 예고편 영상에서도 유아인의 모습은 지워졌다.
19일 시사회로 베일을 벗은 ‘승부’의 본편은 달랐다. 영화의 기획 취지와 의미를 고민한 끝에 유아인의 분량을 덜어내지 않고 그대로 관객에 선보이는 정면 승부를 택한 것.
이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출연 배우가 저지른 잘못과 논란이 큰 건 사실이나, ‘승부’는 그 하나로 비난받고 묻혀지기엔 수많은 이의 노력과 공, 울림 있는 메시지들을 담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승부’는 최정상의 위치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와의 대결로 한순간에 추락을 경험한 ‘조훈현’이란 인물이 겪는 갈등과 슬럼프, 재기의 과정을 극적으로 그린다. 유아인이 연기한 제자 ‘이창호’는 동전의 양면처럼 조훈현의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관계성을 지닌 인물이다. 기본적으로는 바둑전설 ‘조훈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나, 그 모든 승패와 추락, 재기의 과정에 이창호가 있었기에 ‘승부’는 이창호를 빼고선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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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는 천재 신동으로 불린 이창호와 조훈현 두 인물의 질긴 사제 인연과 관계성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입체적으로 그린다. 조훈현이 이창호란 신동을 발견해 제자로 들이고 교육하는 과정이 1부, 프로기사로 성장한 이창호가 끝내 스승을 뛰어넘어버린 뒤 조훈현이 방황을 겪는 과정이 2부, 조훈현이 제자를 통해 ‘승부’의 세계를 다시 깨닫고 재기에 나서는 과정까지 3부극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푼다. 이창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역 김강훈과 이병헌의 연기 케미스트리, 성인 이창호를 연기한 유아인, 이병헌의 케미스트리 간 차이를 느끼는 것도 감상 포인트다.
아역이 등장하는 초반부부터 서사와 관계성을 잘 쌓아놨기에 중후반부 본격적인 대결과 승패가 펼쳐지는 과정에 몰입하는데 무리가 없다.
특히 대국 장면들은 연출에 상당한 변주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바둑을 아는 관객이 본다면 감동이 더 크겠지만, 바둑을 알지 못해도 충분히 무리없이 감상이 가능하다. 특히 조훈현과 이창호가 대국 중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해 비둑판 위 시뮬레이션을 펼치는 장면에 쓴 연출이 상당히 리드미컬하고 인상적이다. 표정을 최대한 지우고 있지만, 승기를 뺏고 빼앗기며 미묘하게,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이병헌과 유아인의 표정, 몸짓 변화 등 열연이 여느 스릴러 못지 않은 쫄깃한 긴장을 안긴다.
80년대, 90년대의 풍경과 시대 정신을 그린 실화극, 정적이지만 치열한 ‘바둑’의 세계를 그린 스포츠 영화, 조훈현과 이창호의 관계와 인생사를 그린 휴먼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적 매력을 갖추고 있다.
오프닝에서부터 세계 뱌둑대회에서 우승한 조훈현 9단의 모습, 이를 뉴스로 접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희망찬 분위기를 스크린에 담아 관객을 몰입으로 이끈다. 우선 시대극으로서 당시의 신문기사, TV뉴스 화면, 추억의 간식, 사람들의 헤어스타일, 각종 소품으로 타임머신을 탄 듯 세심히 구현한 시대 고증이 눈에 띈다. 실존 인물을 다룬 작품인 만큼 캐릭터와 배우 간 외적, 내적 싱크로율을 높이는 과정에도 많은 공을 들인 노력이 돋보인다. 이병헌과 유아인의 변신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병헌은 조훈현 국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2대 8 가르마 헤어스타일에 도전한 것은 물론, 당시 조훈현 국수가 입었던 실제 옷과 거의 흡사한 의상들을 입고 등장한다. ‘승부’를 위해 극 중 갈아입었던 옷들만 약 50벌에 달한다. 또 실제 조훈현 국수가 대국을 치를 때 취하는 버릇과 습관, 특유의 제스처, 손짓 등 몸짓과 표정의 디테일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유아인 역시 이창호 9단 특유의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 이창호 9단이 당시 입었던 옷과 헤어 스타일 등을 거의 흡사히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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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고 있는 요소들이 많지만 몰입에 가장 중요한 서사와 감정선의 흐름 역시 놓지 않았다. 최정상의 위치에서 한순간에 한참 어린 제자에게 패배를 맛봤다는 굴욕감, 굴욕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끼는 조훈현의 괴로움,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웃지 못하고 자신을 부모처럼 기르고 가르침을 준 스승을 꺾었다는 이창호의 죄책감, 그런 제자 앞에 애써 마음을 다잡고 승부의 정신을 되새겨주려는 스승 조훈현의 담대함. 이 모든 감정선을 경험한 뒤 만나는 마지막 대국 장면이 먹먹한 감동을 자아낸다. 다른 스포츠, 게임에 비해 다소 정적인 바둑 소재의 딜레마를 배우들의 열연, 공들인 미쟝센, 입체적 캐릭터와 감정선을 조화로이 엮어 극복했다. 주옥같은 명언의 향연, 이를 더 맛깔나게 살려낸 배우들의 앙상블 파티가 극의 여운을 더한다.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어른, 바둑 팬들이라면 무조건 반길 작품이며 바둑을 몰라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연주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작품이다. 돌고 돌아 극장에서 만나게 돼 더욱 반가운 영화다.
3월 26일 개봉. 러닝타임 1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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