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여자라서. 뒤늦게 글을 배운 노년 여성의 시(詩)는 뮤지컬 넘버가 되고, 젊어서는 아이를. 늙어서는 남편을 간호하던 여성의 몸짓은 무용으로 피어난다. 미디어가 자극적으로 묘사하던 ‘치매 노인’은 주인공이 돼 기상천외한 모험을 떠난다. 미디어 속 편협하게 묘사된 노년이 아닌, 나이 듦의 다양한 면면을 조명한 다수의 공연이 이번 2월 ‘창작산실’ 무대에 오르면서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가의 집에서 ‘창작산실’ 3차 기자간담회가 열려 창작진과 대화를 나눴다. ‘창작산실’은 연극, 창작뮤지컬, 무용, 음악, 창작오페라, 전통예술 등 기초 공연예술 분야의 우수 신작을 발굴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이미 올해 ‘창작산실’ 신작 31편 중 11편의 막이 올랐고, 이번 2월 6일~21일까지 일곱 편의 작품이 새롭게 펼쳐진다.
치매 노인의 세계를 무대로 -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이번 라인업은 특히 노년의 삶과 몸을 활용한 뮤지컬과 무용들이 눈길을 끈다. 오는 2월 6일 문을 여는 창작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치매인이자 70세 여성 고춘자가 주인공이다. 유독 치매라는 병과 당사자 및 가족의 삶은 비극적으로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이 극은 느슨해진 정신의 틈으로 빠져나온 '영혼의 물고기'와 함께 춘자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모험을 떠난다.
실제로 오미영 연출 겸 작가는 치매인을 둘러싼 고통을 그리기보다, “치매를 앓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치매라는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고춘자의 시선을 락, 트롯, 보사노바 등 다양한 음악 장르와 다채로운 은유적 상징으로 구현한 점도 관전 포인트다.
오 작가는 “우리가 늙어가며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고, 뇌의 주름은 펴지는데 이게 치매”라고 했다. 그는 “치매를 소재로 하지만 늙어가고 있는, 그래서 반드시 언젠가는 이별하게 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라며 “늙고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사랑하는 습관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라고 강조했다.
노년 여성의 삶과 몸과 시...뮤지컬과 무용으로
오는 11일 개막하는 창작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도 주목할 작품이다. 가난과 성별로 학교에 가지 못한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는 내용으로 사랑받은 다큐멘터리 ‘칠곡가시나들’(김재환 연출)과, 이를 토대로 한 에세이가 작품의 원작(‘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다.
“흔히 노년의 삶은 무겁게만 그려지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이 팔순이 넘어도 즐겁게 배우며 삽니다. (...) 노년은 불행한 것만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강병원 프로듀서
뮤지컬은 다큐멘터리를 온전히 극화하지 않았고 무대에 서는 건 전문 배우다. 하지만 할머니들과 수많은 대화를 통해 실제 삶을 반영했고, 원작의 김재환 연출이 예술 감독을 맡았다. 한글로 쓴 노년 여성의 시는 뮤지컬 넘버가 됐고, 무대 디자인에서도 할머니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또 남편을 간호하고. 평생 누군가를 위해 움직인 여성 노인의 몸은 춤으로도 피어났다. 노년의 삶에서 잊고 있던 로망의 빛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춤으로 담은 작품, ‘로망(Roman) 노망(老妄)’(2월 21일 개막) 얘기다. 이를 위해 70대부터 80대까지, 전문 무용수뿐만 아니라 일반 노인을 무대에 세웠다.
문성연 안무가가 비전문가 노년 여성과 춤을 짓는 과정은 ‘노년’에 대한 편견을 깨는 공부이기도 했다. 무조건 춤을 가르치기보다 주 2회 만나 대화부터 했다. 하루 장장 4시간 동안 자식 이야기를 포함한 온갖 이야기가 쏟아졌다. 문 안무가는 “처음에는 할머니들과의 대화에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어떤 이야기는 선생님(노년 여성들)의 몸 자체에 있겠구나 싶어” 삶의 동작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고 했다. 노년 여성들이 아이를 안으며 달래는 모습, 또 놀이를 하는 모습이 그 예다.
"젊은 무용수들과는 어떻게 기술적으로 더 멋지게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어요. 그런데 이 작업을 할 때는 70년, 80년 사용된 몸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4막인 작품의 마지막, 관객과 ‘인사’하는 ‘커튼콜’은 무려 10분간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삶의 은유인 듯하다. 문 연출가는 “왜 갑자기 커튼콜이 시작되지?라고 생각될 정도로 갑자기 인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다고 생각했다”면서 “(남겨진 이들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이 담겼다는 설명이다.
불안한 청춘의 세상은 어디 - 연극 ‘저수지의 인어’
노인에 대한 사유는 젊음에 대한 사유와 짝꿍이다. ‘나이 듦’과 ‘주름’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에서 ‘청년’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젊음과 청춘에게 반짝임을 강요하는 통속적인 이미지가 그것이다. 하지만 실제 청년들은 지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저성장의 시대를 불안하게 지나는 중이다. 오는 7일 개막하는 연극 ‘저수지의 인어’는 청년 작가가 그린, 작가지망생이자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청년 철수의 이야기다. 현실에 부딪친 그가 저수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 송천영 작가는 “모두가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가치를 찾아가고 용기를 찾아가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공연을 지원하는 ‘창작산실’의 2월 개막작은 새로운 소리와 몸짓으로 채워진다. 무용 '피안의 여행자들'은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전통 음악, 무용가들과의 협업한 작품이다. 전통예술 '남도 선소리 시를 읊다 : 님이 침묵한 까닭?'(부제 : 중中머리에 대하여)(2월 7~9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남도 특유의 선율과 장단인 육자배기와 흥타령을,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비롯한 일곱 편의 근현대 시와 함께 풀어낸다. 판소리 남자명창은 민요를 부르면 안 된다는 터부가 있지만, 남자 명창 7명이 작업을 시도한 점도 남다르다는 설명이다.
오는 7일 개막하는 무용 'GRAVITY'는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를 ‘중력’을 끌어들여 몸으로 표현한다. 류장현 연출가는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을 스포츠에서는 ‘데드 포인트’라고 말한다. 한 시간 동안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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