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래된 재즈바에서
그중에서 신포로23번길에 위치한 버텀라인은 1983년 문을 연 이래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내 1세대 재즈바다. 치앙마이의 노스게이트, 도쿄의 썸타임, 교토의 로쿠데나시에 이어 이곳을 나의 즐겨찾기에 추가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이토록 간절하진 않았으리라. 코로나 이후 부산의 몽크나 서울의 원스 인 어 블루 문 같은 상징적인 재즈클럽이 하나둘 폐업하거나 영업을 중단하면서 나의 위기감도 점차 고조되었다. 이제 버텀라인은 서울의 디바 야누스, 올댓재즈, 천년동안도와 함께 재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실낱 같은 희망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존재함’은 얼마나 고단한 투쟁을 동반하는 일인가. 그러나 30년 동안 한결같이 이 공간을 가꾸어온 허정선 씨는 아주 단순하게 대답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역대급 한파로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은 날이었다. 2년 만에 버텀라인의 무대에 선다는 김중회 쿼텟의 멤버들이 리허설을 위해 칼바람을 뚫고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예약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도착한 손님들이 아직 개장하지 않은 가게 앞을 어슬렁거렸다. 사장님은 언제나처럼 영업 준비를 시작했고 매장엔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 부부의 듀엣곡에 이어 데니스 킹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울려 퍼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모두, 사랑이었다.
하퍼스 바자 젊은 시절 버텀라인의 단골손님이었다고. 어떤 계기로 5대 사장이 되었나?
허정선 30년 전이다. 버텀라인은 당시에도 이미 이 동네에서 유명했다. 나는 음악과 술을 좋아하는 스물아홉이었고, 나와 내 친구들에게 이곳은 일종의 사랑방이었다. 밤이 되면 약속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던 곳.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이 공간을 사랑한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지금은 발목 잡힌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말이다.(웃음)
하퍼스 바자 이곳 신포동은 오랫동안 인천 대중문화의 성지였다.
허정선 인천은 항구도시고 신포동이 그 중심에 있었기에 재즈가 유입되기 좋은 환경이었다. 해외의 LP들이 항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다. 당시엔 재즈클럽뿐만 아니라 록카페나 음악감상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 공간이 존재했다. 음악을 몰라도 인천 멋쟁이라면 다 왔다는 곳들이다. 이 동네엔 여전히 그 시절 음악 문화가 남아 있다.
하퍼스 바자 〈한국 재즈 100년사〉에도 버텀라인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83년 인천에 버텀라인이 오픈하였다. 현재 부근에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이 있는 버텀라인은 2013년으로 30년이 되는데 아마 자리를 옮기지 않고 3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키는 곳은 버텀라인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원스 인 어 블루 문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상징성 있는 재즈클럽도 코로나를 거치며 하나둘 폐업했다. 버텀라인은 어떻게 버텼나?
허정선 부산의 몽크도 비슷한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거기도 문을 닫았고 우리만 남았다. 코로나 시기엔 손님도, 공연도 없었다. 국가지원금으로 겨우 유지했고 지금까지 그때의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체감하기로는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요즘은 전통적인 클럽이 아니라 다이닝 바 형태가 유행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못하겠더라. 먹는 것보다 듣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운영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손님들이 “아직도 여기 그대로 있네요”라고 말해줄 때 힘을 얻는다. 한번은 10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손님이 옛 추억을 떠올리며 찾아왔더라. 첫사랑과 자주 왔던 곳이라며. 그런데 며칠 후 우연히 그 첫사랑을 만나서 이번엔 두 분이 같이 방문했다. 나이가 든 모습으로 여전히 함께 있는 두 분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따뜻했는지 몰랐다. 아버지와 딸이 따로 놀러 왔다가 우연히 한 테이블에서 만난 경우도 있고. 오래된 장소라서 가능한 일들이 아닐까 싶다.
하퍼스 바자 게다가 이 건물은 1900년대에 지어진 적산가옥이다.
허정선 일제시대에 ‘후루다 양행’이라고 핸드백, 넥타이, 모자 따위를 팔던 편집숍이었다고 하더라. 일단 층고가 높고 콘크리트가 아니라 짚, 갈대, 대나무로 지어진 건물이라서 음악을 듣기엔 최적의 공간이라 생각한다. 특출나게 좋은 장비를 사용하지 않아도 소리의 울림이 남다르다고, 연주자들도 자주 언급한다.
하퍼스 바자 재즈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재즈의 맛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허정선 거침없는 자유로움. 같은 곡도 뮤지션마다 달리 연주하는 게 재즈다. 듣는 사람은 그 자유로움을 그대로 즐기면 된다. 재즈가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 고급 문화로 인식된 탓에 대중화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일본만 해도 거리에서도, 국숫집에서도 자연스럽게 재즈가 흘러나온다. 공부하듯 재즈에 접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주자들이 치열하게 연습하고 깊이 고민한 결과물을 우리는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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