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풍경 | 루이즈 부르주아 개인전 자문 큐레이터 필립 라라트 스미스 인터뷰

끔찍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풍경 | 루이즈 부르주아 개인전 자문 큐레이터 필립 라라트 스미스 인터뷰

마리끌레르 2025-01-10 18:29:03 신고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70여 년 동안 조각, 회화, 직물 작업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양면성의 긴장감을 탐구했다. 도쿄의 모리 미술관에서 2025년 1월 말까지 열리는 개인전은 ‘지옥 같은’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부르주아의 삶을 1백여 점의 작품을 통해 소개한다. 이번 전시의 자문 큐레이터 필립 라라트 스미스와 부르주아가 무의식의 세계에서 벌인 투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루이즈 부르주아(1993)
PHOTO: Philipp Hugues Bonan, ©The Easton Foundation, New York

“지옥에 갔다가 돌아오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곳은 멋졌다.” 지난 12월 초, 누적 관람객 수 10만 명을 기록하며 큰 관심을 모은 루이즈 부르주아 개인전 <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은 한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작품은 고인이 된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손수건에 자신의 일기 속 문장을 수놓아 만든 직물 작품이다. 1911년 성탄절에 앤티크 태피스트리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부르주아는 파리 근교의 작업장에서 어머니와 집안 여자들을 도와 손상된 태피스트리를 손보며 자랐다. 부르주아가 10대가 되자 그의 아버지는 입주 가정교사이던 영국 소녀와 밀회를 즐기기 시작했고, 이 사건이 부르주아의 정신에 어떤 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늘의 마법 같은 힘에 매료”되었고, 이 매혹은 평생 단 한 점의 옷가지도 버리지 못한 그가 80대가 되어 그것들로 작품을 만들게 했다. 앞서 언급한 1996년 작품은 이러한 작품 중 하나로, ‘양가적 감정,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 예술을 통한 구원, 블랙 유머의 어조’를 포함하는 이번 전시의 포괄적 제목으로 선택되었다.

글귀를 수놓은 직물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 이번 전시는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 안에서 텍스트의 가치를 강조한다. “무의식은 나의 친구”라고 말한 부르주아는 1951년 애증의 대상이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했고, 40여 년에 걸쳐 방대한 양 의 기록을 남겼다. 필립 라라트 스미스(Philip Larratt-Smith)는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 는 원초적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라며 “부르주아는 작업하는 행위를 정신분석의 한 형태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평생 거주와 작업을 위해 머물던 뉴욕 의 타운하우스를 이어받아 부르주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이스턴 재단(The Easton Foundation)의 유일무이한 큐레이터다.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카이비스트로서 부르주아의 모든 글을 연구했으며, 이를 통해 저서 <Louise Bourgeois: 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펴내고, 뉴욕 유대인 박물관에서 전시<Louise Bourgeois: Freud’s Daughter>를 선보이며 심오한 해석을 제시했다. 인터뷰는 “예술은 정신 건강을 보장한다”고 언급한 부르주아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자 기획되었다.

‘Clouds and Caverns’, 1982~1989, Metal and wood, 274.3×553.7×182.9cm
‘The Runaway Girl’, circa 1938, Oil, charcoal, and pencil on canvas, 61×38.1cm
PHOTO: Christopher Burke,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JASPAR, Tokyo, and 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이스턴 재단에서 큐레이터로서 하는 일과 재단의 비전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제 업무는 전시 기획(직접 큐레이팅하거나 미술관 큐레이터에게 자문 역할로 협력하는 방식), 출판, 딜러나 컬렉터 혹은 언론과 소통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이스턴 재단의 주요 임무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업 유산을 알리고, 원본에 대한 학문과 연구를 장려하며, 그의 작품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전시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주아가 평생에 걸쳐 쓴 방대한 글과 그 외 자료를 포함한 루이즈 부르주아 아카이브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며, 이는 앞으로 수년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아직 부르주아의 예술과 삶의 의미를 풀어가는 시작점에 있다고 느낍니다.

도쿄 모리 미술관(Mori Art Museum)에서 진행 중인 전시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전시장에 붙은 작품 캡션에서 ‘Collection: The Easton Foundation, New York’ 이라는 문구를 여러 번 발견했는데, 재단이 소유한 중요한 작품이 상당수 포함돼 이해를 높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 전시에서 맡은 자문 큐레이터(Advising Curator) 역할은, 모리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쓰바키 레이코(Tsubaki Reiko) 씨, 야나기 마나부(Yanagi Manabu) 씨와 긴밀하게 협력해 부르주아의 작품을 일본 관객의 성향에 맞게 소개하는 동시에, 부르주아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갔다가 돌아오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곳은 멋졌다) 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이라는 세 장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식을 고려했습니다. 이 삼분법적 구조는 헤겔의 정반합 개념처럼 작용합니다. 첫째 장인 ‘나를 버리지 마세요(Do NotAbandon Me)’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긍정적 감정과 연결되고, 둘째 장인 ‘지옥에 갔다가 돌아오다(I Have Been to Hell and Back)’은 아버지와 관련된 부정적 감정을 다루며, 마지막 셋째 장인 ‘하늘에서의 치유(Repairs in the Sky)’에서는 그의 치유 예술을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전시 도입부에 자리한 ‘The Runaway Girl’은 부르주아가 미국의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골드워터(Robert Goldwater)와 결혼한 후 프랑스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한 직후에 그린 초기 자화상입니다. 이 작은 그림으로 전시를 시작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이 전시는 부르주아의 기나긴 예술적 커리어를 아우르는 장이므로 도입부에 초기 작품인 ‘The Runaway Girl’(c.1938)과 후기 작품인 ‘The Hidden Past’(2004)를 함께 배치하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작품의 조합은 부르주아 작품 속에서 과거를 지워버리고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그 과거가 그의 정체성을 만들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것을 놓을 수 없는 감정 사이에 내재된 긴장감을 잘 드러냅니다. 특히 ‘The Runaway Girl’은 작가가 1938년,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한 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망자 소녀라고 생각했죠. 멀리 보이는 바위와 파도는 그 여정이 얼마나 도전적이었는지를 상징합니다. 부르주아는 종종 자신이 “프랑스에 남았다면 예술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작가로서 새로운 예술적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과거가 가지는 ‘마법’과 ‘미스터리’, ‘드라마’에 여전히 강렬하게 이끌렸고, 이 힘은 평생 동안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Crouching Spider’(2003)와 ‘Excerpts from Louise Bourgeois’s Performance A Banquet/A Fashion Show of Body Parts’(1978)가 설치된 전시실 전경.

많은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의 ‘거미’는 아주 익숙한 대표작일 겁니다. 저도 여러 전시에서 ‘거미’를 수도 없이 봤지만, 이번 전시에서 ‘Crouching Spider’(2003)와 ‘Excerpts from Louise Bourgeois’s Performance A Banquet/A Fashion Show of Body Parts’(1978)가 어우러진 전시실에서 처음으로 ‘거미’의 진면목을 가슴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지만 그런 만큼 통제하고 싶어 한 엄마와 대립하던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났거든요. 여러 ‘거미’ 가운데서도 재단 컬렉션인 ‘Crouching Spider’를 그 자리에 놓은 의도와, 퍼포먼스 영상을 ‘거미’와 연결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부르주아는 때때로 어머니와의 이별을 원초적인 버림받음으로 표현했습니다. (부르주아의 어머니는 병석에서 지내다 1932년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앞으로 일어날 모든 미래 관계의 원형으로 보았습니다. ‘거미’는 어머니에 대한 찬사로 구상되었습니다. 부르주아가 ‘거미’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1990년대가 그의 작품 모티프에 대한 충동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전환된 시기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거미는 파리 근교의 도시 앙토니(Antony)에서 태피스트리 복원 작업을 이끌던 어머니를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거미가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짜듯, 부르주아는 자신의 예술이 자신의 몸에서 직접 나온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Crouching Spider’는 동적이고 낮게 내려앉은, 공격적인 자세로 조형되어 마치 반동을 준비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모든 거미가 그렇듯, 그것은 단순히 모성의 자비로운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어두운 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 사냥감을 포획하고 죽여 먹이로 삼습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과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이 조각 작품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표현합니다. 그 해는 의도적일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모리 미술관의 큐레이터들과 저는 이 작품을 부르주아의 퍼포먼스 작품 안에서 수전 쿠퍼(SuzanneCooper)가 공연하는 대형 프로젝션 화면과 나란히 배치하기로 했는데, 이는 그가 관심을 기울인 주제가 다양한 매체와 시기를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수전 쿠퍼가 드레스를 입고 큰 소리로 “그녀가 나를 버렸어(She abandoned me)”라고 노래할 때, 그것은 관객의 신경계를 자극하고, 이 보편적 경험에 대한 즉각적이고 어쩌면 무의식적 반응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관객은 그가 방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노래를 듣고, 이윽고 ‘Crouching Spider’가 방 한구석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방에서는 폭발적인 정신적 에너지와 좁혀오는 감정적 압박감이 느껴지며, 이는 자궁이 덫처럼 변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에너지는 나쁜 어머니의 형상을 묘사한 조각적 요소(전시실 한쪽에 자리한 조각 작품 ‘I Undo’를 가리킨다)와 맞물려 있습니다. 아이를 버리는 어머니, 아이에게 영양분을 주는 대신 바닥에 모유를 쏟는 어머니, 심지어 방치하거나 최선을 다하느라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어머니까지 – 그 모든 것이 유리병 속에 갇혀 있으며, 투명하지만 마치 표본처럼 봉인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부르주아의 모든 글을 면밀히 살펴본 경험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뉴욕 유대인 박물관에서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를 창의성이 발휘되는 트라우마적 핵심인 오이디푸스 교착상태에 초점을 맞춰 재해석한 전시였는데, 그 전시의 주요 작품인 ‘The Destruction of the Father’(1974)를 이번에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오만한 허풍을 떠는 아버지를 먹어버 리는 어린 시절의 환상이 담긴 그 작품 옆에는 남성 생식기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보호해 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보호본능을 표현한 ‘Janus Fleuri’(1968)와 ‘Fillette(Sweeter Version)’(1968~1999)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다큐멘터리 영상 속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분노는 저로 하여금 작품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 방의 연출은 당신이 부르주아의 정신분석 텍스트(psychoanalytic writings)를 연구하며 발견한 점 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부르주아의 텍스트를 살피는 것이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저술의 가치에 관해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르주아를 빈센트 반고흐, 벤베누토 첼리니,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위대한 예술가이자 작가로 생각하며, 그의 모든 작품이 사라지더라도 그의 글은 여전히 읽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스타일의 장식적 특징을 벗겨내고 감정적 진실을 정밀하게 포착하려 시도한 훌륭한 문장가(stylist)입니다. 수백 번 읽은 글도 가끔 다시 보면 여전히 숨을 멈추게 합니다. 그의 정신적 붕괴와 점진적 회복, 그리고 그가 많은 것을 얻었지만 종종 갈등을 겪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깊은 몰입을 기록한 이 글은 그의 시각적 산출물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모리 미술관 전시의 전체적 개념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식의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 장에서 묶인 구성을 설명하는 데 정신분석학적 글들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에도 부르주아의 작품은 정신분석학과 연결 짓지 않더라도 순수하게 형식적인 차원에서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부르주아의 글을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라이트 프로젝션(Light Projection)으로 시각화하고 작품화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텍스트가 지닌 내밀함, 비밀스러움을 없애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 의도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제니 홀저의 라이트 프로젝션은 부르주아의 글에 물리적 형태와 생명력을 부여해, 그것이 단순히 벽에 걸린 아카이브 문서가 아니라 전시의 살아 있는 요소로 변하게 만듭니다. 그 글의 내밀함과 비밀스러움은 입체적으로 드러나며, 마치 조각처럼 공간을 채웁니다. 부르주아의 글이 벽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스크롤되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의 무의식 속에서 단어들이 거품처럼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글들은 그들이 놓인 공간을 하나의 전체적인 설치 작품처럼 변형시키며(사실 ‘몰입적’이라는 단어는 이제 좀 진부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는 부르주아가 원한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큐레이터들은 그 글들이 지닌 현재성이 모리 미술관을 찾는 젊은 관객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느꼈습니다.

부르주아와 어시스턴트였던 제리 고로보이(Jerry Gorovoy)의 관계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대형 조각 ‘The Couple’(2003) 뒤로 고로보이와 자신의 손 윤곽선을 따라 그려 관계를 묘사한 드로잉 작품 ‘10 AM Is When You Come to Me’(2007)가 펼쳐진 코너라든가 도쿄의 도시 전경을 배경으로 고로보이가 모델이 된 조각 ‘Arch of Hysteria’(1993)를 보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부르주아와 고로보이 관계의 심리적 역학을 어떻게 분석하나요?

부르주아는 고로보이를 “공갈 젖꼭지(pacifier)”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저는 그가 부르주아의 행동 뒤에 숨겨진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 인내, 그리고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1980년에 만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주아는 그의 판단력, 시각적 예리함,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섬세한 배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고로보이는 부르주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며, 그가 방해받지 않고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고, 그를 대신해 갤러리, 박물관, 비평가, 언론 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처리했습니다.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고로보이는 부르주아의 삶에서 남자인 어머니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 로버트 골드워터와 정신분석가 헨리 로웬펠드(Henry Lowenfeld)와 함께 부르주아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부르주아는 고로보이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을 알았던 겁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 루이즈와 제리의 사랑 노래(ballad)처럼요. ‘Arch of Hysteria’에 관해 잠깐 얘기하자면, 이는 부르주아가 히스테리와 그것이 정신분석학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진 것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는 프로이트처럼 히스테리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고, 그것이 성별에 관계된 질병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처음에 부르주아는 고로보이의 아치형 몸체를 주조했는데, 이것은 유명한 히스테리의 아치 – 즉 억제된 정신적, 성적 긴장을 표현하는 히스테리의 상징적 모습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고로보이의 큰 발가락이 주조 중에 경련을 일으킨 사실에 기뻐하며 그것을 그대로 남겼습니다.) 그는 이 아치형 조각을 뒤틀어 완벽에 가까운 원 형태로 만들었고, 고로보이의 배꼽에 매듭을 걸어 천장에 매달았습니다. 이 작품은 부르주아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이며, 특히 제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어느 기자가 부르주아에게 왜 고로보이를 이 조각의 모델로 삼았는지 물었을 때, 부르주아는 “그를 미술 역사에 남기고 싶었다”고 답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예술은 정신 건강을 보장한다(Art is a guaranty of sanity)”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고 자기 파괴적 행동을 일삼았으며 옷과 편지 등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심리적 어려움을 예술로 승화했고, 그의 말대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중요하겠지요. 당신은 병리적 측면이 두드러지는 예술가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최근 런던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엄청난 전시를 보고, 그가 작품 속 인물들에게 상처를 입혀 그들의 현실을 관객의 신경에 강하게 전달하려 했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요즘 현대미술은 사회적 이슈를 설명하는 작품이 많은데, 저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롭고 미묘한 것,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하고 때로는 충격적인 것들에 끌립니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을 느끼죠. 마치 한 사람에게 느끼는 끌림과 비슷합니다. 심리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가진 작품, 병리적인 면이 뚜렷한 예술가들의 작업은 많은 면에서 프로이트가 언급한 신경증 환자들과 닮아 있습니다. 그들의 비정상적 면은 오히려 정상적 심리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예술가는 우리가 문명을 가능하게 만든 승화(sublimation)의 가치를 일깨웁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승화하지만, 예술가는 이를 비정상적으로 높은 정도로 수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진정한 사회적 가치이며, 일시적 유행이나 순간적 관심사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부르주아 예술의 주제를 양면성으로 설명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 양면성은 피부로 와닿는데요.

부르주아의 작품은 종종 이분법적 대립과 모순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식과 무의식, 남성과 여성, 살인과 자살, 수동과 능동, 과거와 현재, 모성과 부성의 관계가 있죠. 이러한 이중성은 종종 서로 의존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각 개념은 그 반대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우리는 종종 남성적 특성이 여성적 면을 띠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런 이중성은 작품 속에서 자주 보이는 양가적 감정을 드러내며, 그 감정들이 어떻게 발산되고 처리되는지 – 사랑과 증오, 죄책감과 보상, 공격성과 해방 – 탐구합니다. 양가적 감정을 표현하고, 그것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상징적 형태로 변형하는 능력은 부르주아의 예술에서 중요한 특징이며, 그의 천재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전시 타이틀과 동명의 작품 ‘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1996)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물론 부르주아의 직물 작품들은 노년기에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부르주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정신 분석적 작용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수면 위로 떠올라 직물 작품으로 승화된 것으로 봐야 할까요?

부르주아의 패브릭 작품들은 매우 풍부하고 매혹적인 영역입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부르주아 자신이 입었던 옷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작품에 현실감을 더해줍니다. 각 의상은 특정 시간과 장소, 감정적 상태나 사건, 관계의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그 옷들은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작품에 이를 넣음으로써 자신이 죽었을 때 버려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진 버려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옷들을 버릴 수 없었고, 자신 또한 그렇게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입니다. 비슷하게, 1932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부르주아(당시 21세였다)에게는 버려진 것으로 여겨질 만큼 큰 트라우마였고, 그는 어머니의 옷을 가져와 몇십 년 동안 간직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어머니의 옷을 작품에 넣을 때조차 자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옷과 달리 어머니의 옷에는 그런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2025년 8월에 호암미술관에서 선보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2025년 호암미술관에서 부르주아 전시를 진행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모리 미술관 전시의 내용을 호암미술관의 독특한 공간에 맞게 조정할 예정이며, 리움이 소장한 부르주아 작품들도 함께 선보일 계획입니다. 부르주아의 <Maman>(1999)이 멋지게 설치된 호암미술관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몇 점의 조각을 추가로 전시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세요.

‘Couple IV’(1997) 뒤로 제니 홀저의 ‘Bourgeois×Holzer Projections’(2024)을 설치한 전시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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