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를 위한 변명

한국 야구를 위한 변명

에스콰이어 2025-01-09 00:00:03 신고

3줄요약
‘우물 안 개구리’, 혹은 ‘배부른 돼지’. 한국프로야구에 따라붙는 조롱이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프리미어12 등 국제 대회에서 조별 탈락하는 수준인데 연봉은 높게 받는다는 것이다. 국민 스포츠는 축구인데, 저런 식의 조롱은 유독 ‘프로야구’에만 집중된다. 1000만 관중을 동원하는 프로 스포츠가 되면서 관심이 집중된 것은 이해하지만, 나름 변명의 여지는 있다. 국제 대회 성적이 기대 이하인 것은 맞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주관하는 WBC에서는 2009년 준우승 이후 2013년, 2017년, 2023년 대회 때 모조리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세계 야구 소프트볼 연맹(WBSC)이 주관하는 프리미어12에서는 2015년 우승, 2019년 준우승을 했지만 11월 끝난 3회 대회 때는 예선 탈락했다. 같은 조에 속한 대만과 일본에 졌기 때문인데, 대만과 일본은 슈퍼 라운드(4강)에서 미국, 베네수엘라와 경쟁해 나란히 결승전에 올랐고 대만이 결국 우승했다. 대만은 프로가 참가한 국제 대회 첫 우승이었다. 일본은 국제 대회 27연승이 끝났다.
사실 2024 프리미어12 때는 대표팀 구성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2023년 개최) 때 금메달을 합작해냈던 1, 2선발 원태인(삼성 라이온즈), 문동주(한화 이글스)가 부상으로 빠졌다. 일본전 유력 선발 후보였던 손주영(LG 트윈스) 또한 다쳤다. 도쿄 올림픽 때 꽤 괜찮은 투구를 보여준 왼손 투수 이의리(KIA)는 팔꿈치 수술로 재활 중이다. 이래저래 선발투수가 부족했다. 고영표(KT 위즈), 곽빈, 최승용(이상 두산 베어스), 임찬규(LG) 등의 선발진은 조별리그 5경기 동안 단 한 번도 5이닝 이상 채우지 못했다.
선발투수만 없던 게 아니다. 타자도 부족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4번 타자였던 노시환(한화)이 부상으로 이탈했고, 강백호(KT), 김혜성(키움 히어로즈)이 군사 훈련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구자욱(삼성) 또한 플레이오프 때 다리를 다쳤다. ‘한 방’을 갖춘 클러치 능력이 있는 선수가 올 시즌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김도영(KIA) 정도뿐이었다.
게다가 WBC나 프리미어12에는 병역 혜택 같은 보상이 없다. 프로 선수들인데 보상은 FA(자유계약) 일수를 채워주는 것 정도뿐이다. 대회 긴장도나 집중도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축구가 아시안컵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야구는 병역 혜택이 있는 아시안게임에서는 2010년 광저우 대회부터 2023년 항저우 대회까지 4연패를 하고 있다.
한국 야구는 2006년 1회 WBC 4강, 2008년 베이징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2009년 2회 WBC 준우승을 하면서 화양연화를 맞았다. 국제 대회 호성적과 더불어 케이블 TV에서 전 경기가 중계되면서 폭발적으로 관중이 늘었다. 2008년 500만 관중을 넘긴 KBO리그는 2011년 600만, 2012년 700만을 돌파했다. 2016년에는 800만 관중을 찍고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잠시 소강 상태에 있다가 엔데믹 이후 관중이 다시 늘어나 올해 기어이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을 넘어섰다.
국제 대회 성적이 거듭 좋지 않았고, 야구단 안팎으로 안 좋은 일들(횡령·음주운전·온라인 도박 등)이 이어졌으며, 네이버·다음 등 포털 무료 생중계가 사라졌는데도 야구 인기는 오히려 늘어났다. 지속 가능한 인기를 위해 국제 대회를 통해 전국구 스타가 등장해야만 하지만, 프로야구단 인기는 응원 팀 성적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주 6일 동안 이어지는 프로야구는 연고 지역과 밀착 관계에 있고 ‘우리 선수’ ‘우리 팀’이 ‘국가대표팀’보다는 우선한다. 프리미어12에서 조기 탈락하고도 “대표팀은 졌지만 ‘우리 ○○○’만은 이겼다”라고 자위하는 구단 팬들이 많았던 이유다.
“실력은 모자란데, 연봉만 많이 받는다”라는 시선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2024시즌 기준 프로야구 평균연봉은 1억5495만원이었다. 2023시즌 프로축구 K리그1(1부리그 12개 팀) 평균연봉은 2억3158만8000원(외국인 선수 제외), 2023~2024시즌 남자 프로배구 평균연봉은 2억2900만원(2023~2024시즌)이었다. 남자 프로농구는 평균 1억6000만원(2023~2024시즌)을 받았다. 단순 비교하면, 정규 시즌 동안 프로축구는 38경기, 남자 프로배구는 36경기, 남자 프로농구는 54경기를 치르고, 프로야구는 144경기를 하는데 평균연봉은 축구·배구·농구가 훨씬 높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2024시즌 개막 전 발표한 10개 구단 등록 선수(559명·외국인 선수 30명 제외)를 기준으로 보면, 전체 51.16%(286명)가 연봉 5000만원 이하를 받았다. 5.74%(88명)는 최저 연봉(3000만원)을 수령했다. 키움 히어로즈의 경우 전체 선수단의 61.8%(55명 중 34명)가 연봉 5000만원 이하였다. 단순히 프로 스포츠 최고 연봉자(한화 류현진, LG 박동원. 이상 25억원)나 상위 1%가 누리는 소위 ‘FA 대박’만 보고 프로야구 현주소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언론 노출 빈도가 잦기 때문에 연봉 또한 많아 보이는 착시 현상이 있다.
프로 스포츠 선수가 되기 위해 가장 힘든 취업의 문을 열었는데도 사정이 이렇다. 남자 프로농구는 2024년 신인 드래프트 때 30명(일반인 3명 포함)이 지원해 20명(66.67%)이 구단 지명을 받았다. 남자 프로배구는 42명 중 20명(47.62%)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야구에서는 지난해 1083명이 드래프트에 지원해 110명(10.16%)만이 프로 지명을 받았다. 관중 수입이나 상품 판매 등 매출은 프로야구가 다른 종목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데 정작 대다수 프로야구 선수들은 다른 프로 스포츠 선수보다 대우를 못 받는다. 거의 매일 경기가 있어서 경기장 안팎으로 비난의 강도 또한 훨씬 크다. 참고로 남자 프로농구 10개 구단은 지난 시즌 처음으로 관중 수입 100억원을 넘어섰는데, 이는 10개 프로야구단 관중 수입의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미국, 일본 투수들의 구속이 급격히 빨리지는 구속 혁명 시대가 도래하자 국내 투수들의 구속 문제를 거론하며 비난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구속 또한 조금씩 증가하고는 있다. KBO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리그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시속 141.49km였으나, 올해는 시속 143.51km로 10년 동안 시속 2km가 증가했다. 문동주(한화 이글스)는 2023년 4월 시속 160.1km의 최고 구속을 찍기도 했다. 최고 구속이 시속 155km를 넘는 선수도 꽤 된다. 예전에는 평균 시속 140km 이상의 공을 던지면 신인 드래프트에서 안정권에 있었으나 이제는 시속 145km 이상을 던져야만 구단 스카우트의 눈길을 끌 수 있다.
다만 리그 환경상 강속구 투수들이 선발로 크지 못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외국인 선수 3명 보유-2명 출전으로 바뀐 2014년부터 외국인 투수 2명이 선발 자리를 꿰찼고, 기존 선수들이 나머지 3~4자리를 차지하면서 신인 선수는 아무리 빠른 공을 던지더라도 자연스럽게 불펜 투수로 밀렸다. 현장 감독들은 빠른 공을 던질 경우 1주일에 한 번 쓰는 선발보다는 두세 차례 기용이 가능한 불펜을 더 선호했다. 2010년대 중반 ‘공격 야구가 재밌다’라는 기조 아래 KBO가 공인구 반발계수를 높이면서 극단적인 타고투저가 이어지자 경험이 적은 저연차 투수들은 마운드에서 얻어맞는 게 일상이 됐다. 인내심 없는 구단과 현장 감독이 눈앞의 성적만 바라보면서 덜 성숙된 어린 선수들의 어깨는 불펜에서 소위 ‘갈리는’(소모되는) 리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싱싱한 어깨를 가진 빠른 공의 어린 투수’가 리그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앞서 얘기한 국제 대회 성적과도 관련이 있다. 단기전인 국제 대회는 앞서 언급했듯 선발투수가 중요한데 이런 환경 탓에 KBO는 선발 세대교체 시기를 놓쳤다. 2009년 WBC 때 일본전 선발투수였던 김광현이 14년 뒤인 2023년 WBC 때 다시 선발로 나섰던 점을 떠올리면 한국 야구의 투수 세대교체가 얼마나 더뎠는지 알 수 있다. 원태인, 문동주 등이 국제 대회 경험을 쌓고 있으나 리그 투수층이 얕아 부상 등의 이슈가 겹치면 지난 프리미어12 때처럼 전혀 힘을 못 쓰게 된다. 리그 자체가 어린 투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만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스포츠계에는 ‘월드컵 키즈’와 ‘베이징 키즈’가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박지성, 안정환, 홍명보를 보고 축구에 입문한 선수들을 ‘월드컵 키즈’, 2008 베이징 올림픽을 보고 야구를 시작한 이들을 ‘베이징 키즈’라고 한다. 국내 사정상 스포츠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한정적이고 이 때문에 한쪽으로 선수가 몰리면 다른 한쪽은 암흑기에 접어든다. 2020년 전후로 베이징 키즈들이 프로에 들어서고 있고 이들은 현재 또 다른 야구의 전성기를 이끌려 하고 있다. 프로야구는 지금 과도기에 있다. 2026년 WBC나 2028년 LA올림픽에서는 조금은 다른 모습의 야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김양희는 〈한겨레〉 스포츠 팀장이다. 〈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 〈인생 뭐, 야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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