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박 총장은 국회 긴급현안질의 당시 대통령의 담화 발표로 계엄 선포 사실을 처음 알았고 관련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박 총장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인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47분께 자신의 직속부하인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에게 전화로 “합참에는 인원이 부족하니 육군본부 부장·실장과 이들을 지원할 차장·과장 각 2~3명씩을 모아 계엄사령부(서울 합참)로 올라오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 이들로 계엄사령부 조직 인선을 하려 했던 것이다.
인원들이 부랴부랴 뒤늦게 모였다. 박 총장은 국회가 4일 새벽 1시 1분께 계엄 해제 요구안을 결의했는데도 2시간이 지난 오전 3시 3분 이들에게 서울 용산 합참을 향해 출발하도록 했다. 이들은 2대의 대형 버스에 나눠 타 서울로 향했다. 전시 군사작전과 지휘사항을 송·수신할 수 있는 전장망 장비 총 11대를 소지하고, 총기 휴대 없는 단독군장 차림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소장 5명, 준장 9명, 대령 20명 등 모두 고위 장교들이었다. 대한민국 육군 전체를 대표하는 육군본부 지휘부 간부들이지만, 아무 말 없이 육군참모총장 지시를 따랐다. 비상계엄 조치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는지, ‘항명’에 따른 처벌이 두려워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 세력에 반발해 항명한 여러 장군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대목이다. 영화 ‘서울의 봄’ 등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등은 반기를 든 대표적 인물이다. 이외에도 실제 병력을 동원하진 않았지만 꽤 많은 장성들이 반란군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3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방부 장관이 직접 지시했다는 점에서 전두환 쿠데타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집권 세력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시행된 이번 비상계엄은 위헌·위법 소지가 다분했다. 왜 그 정도의 가치 판단도 못했는지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부당한 지시’를 따른 대한민국 육군 장군들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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